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는 조선시대 예산·덕산·면천·당진 등 충청남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부상 조직의 전통을 계승한 단체이다.
예덕상무사의 명칭은 예산(禮山)과 덕산(德山)의 첫 글자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상업활동과 상호부조, 조직 운영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1851년(철종 2년)부터 조직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상렬(金相烈)이 초대 접장을 맡았으며, 이후 역대 접장과 임원들이 조직을 이끌어 왔다.
예덕상무사는 단순한 상인들의 모임을 넘어 상호 신뢰와 협동, 질서와 의리를 중시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예덕상무사에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귀중한 역사문헌들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① 예산임방입의절목(禮山任房立議節目) — 1851년
예덕상무사의 조직 운영과 규율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이다.
조직의 운영 원칙, 벌칙, 신구 접장 교체 절차, 상례와 부조에 관한 규정 등이 담겨 있다.
이는 1851년 당시 이미 체계적인 조직 운영과 상호부조 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② 보상선생안(褓商先生案) — 1881년
보부상 조직의 역대 인물과 임원들을 기록한 자료로, 조직의 계보와 인적 구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③ 임소좌목(任所座目) — 1885년
보부상 조직의 임원 명단과 직책 등을 기록한 문헌이다.
역대 조직의 운영체계와 인물들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④ 의정부완문(議政府完文) — 1886년
조선시대 관청에서 발급한 공식 문서로, 보부상 조직과 국가 행정체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⑤ 예덕면당사읍임소소임안(禮德沔唐四邑任所所任案) — 1892년
예산·덕산·면천·당진 지역 보부상 조직의 임원과 운영 상황을 기록한 문헌이다.
네 고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보부상 조직의 연합 관계와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예덕상무사의 문헌자료는 1851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조사된 자료는 약 116건에 이른다.
자료는 절목류 6건, 좌목류 81건, 기타 문헌 29건으로 분류된다.
이들 문헌에는 조직의 규율, 임원 명단, 접장 교체, 관청과의 관계, 상호부조 및 제례에 관한 기록 등이 담겨 있다.
특히 일부 고문헌은 국가민속문화유산인 보부상 유품에 포함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문헌은 조선 후기 상업사와 서민생활사, 지역사회 공동체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예덕상무사는 1851년 초대 접장 김상렬로부터 시작하여 역대 접장과 임원들이 조직을 이어 왔다.
접장은 조직을 대표하고 전통의례와 주요 행사를 주관하는 직책이며, 반수와 여러 임원들은 조직의 운영과 전승을 뒷받침하였다.
역대 접장 명부와 임원록은 예덕상무사의 조직적 계승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오늘날에도 예덕상무사는 공문제와 보부상놀이, 전통의례 및 후계자 교육을 통하여 선조들의 정신과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가치는 조선 후기 보부상 조직의 문헌과 유품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과 의례의 전통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다는 데 있다.
고문헌은 과거의 조직과 활동을 증명하고, 공문제와 보부상놀이는 선조들의 공동체 정신을 오늘날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예덕상무사의 고문헌과 역사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고 영구 보존하는 일은 지역의 역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통 상업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중요한 사업이다.
주요 참고자료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보부상 난전 놀이 연구용역 최종보고서』(2013)
『내포의 역사와 문화』(2015)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2016)
예덕상무사 소장 고문헌 및 역대 접장 기록
편집: 예덕상무사 역사자료 정리본
예덕상무사 전승교육 자료
예덕상무사 단원 교육 제1강
강사 전대환 반수
우리는 왜 보부상의 법통을 지켜야 하는가
― 175년을 이어온 예덕상무사의 정신과 우리가 가야 할 길 ―
보부상을 흔히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옛 장사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부상이 뭐 별것인가. 장돌뱅이 아니었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부상의 역사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예덕상무사는 단순히 옛 장사 모습을 재현하는 놀이단체가 아닙니다.
예덕상무사는 초대 김상렬 접장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대가 조직의 법통과 상도(商道), 동료 간의 의리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이어온 역사공동체입니다.
선대 보부상들은 장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서로를 형제처럼 보살피고, 병든 동료를 돌보고, 동료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혼자 살아남기 위한 장사꾼의 조직이 아니라 함께 살고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정신을 오늘의 예덕상무사가 이어가야 합니다.
1. 장사보다 먼저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다
보부상에게 장사는 생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보다 앞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신의였습니다.
대표적인 정신 가운데 하나가 다음과 같습니다.
위상애당(爲上愛黨)
윗사람을 공경하고 동료를 아끼고 사랑한다.
병구사장(病救死葬)
동료가 병들면 서로 구하고, 죽으면 장사를 지내준다.
진충보국(盡忠報國)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한다.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특히 깊이 되새겨야 할 말이 바로 **병구사장(病救死葬)**입니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만 동료가 아니었습니다.
돈이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한 조직에 들어온 사람은 동료였습니다.
병들면 찾아가 보살피고, 어려움에 빠지면 도와주며, 죽으면 마지막 길까지 함께했습니다.
예덕상무사의 옛 규율에는 장례 부조와 애경사에 관한 원칙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부상에게 동료는 장사가 끝나면 헤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함께하는 식구였다는 뜻입니다.
2. 보부상은 스스로 자신을 다스렸다
보부상 조직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르침으로 전해지는 것이 네 가지 계명입니다.
물망언(勿妄言)
함부로 말하지 말라.
물패행(勿悖行)
남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라.
물음란(勿淫亂)
음란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하지 말라.
물도적(勿盜賊)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도둑질하지 말라.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부상들이 이러한 규율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지키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니는 상인이 신뢰를 잃으면 장사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신용이었고 행동 하나가 상단 전체의 명예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부상에게는 장사 기술보다 먼저 신용과 인품이 요구되었습니다.
3. 선배는 후배를 보듬고 후배는 선배를 공경한다
보부상의 정신을 크게 나누면 충의·신의·도의·단결의 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중 오늘날 예덕상무사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신의와 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는 자신이 오래되었다고 후배에게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후배를 가르치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후배는 시대가 달라졌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평생 지켜온 경험과 전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고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조직의 질서입니다.
특히 접장을 지낸 반수와 영위, 두령을 비롯한 원로들은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머릿속에는 수십 년 동안 몸으로 익힌 예덕상무사의 의례와 복식, 공문제, 장터풍장, 행렬과 상무사 운영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전통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전통을 변경할 때는 원로에게 묻고, 기록을 살피고, 구성원의 의견을 모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4. 왜 옛 보부상들은 벌칙까지 만들었는가
보부상 조직에는 매우 엄격한 벌칙이 전해집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간 우애를 저버린 행위, 윗사람을 속이는 행위, 시장에서 강제로 물품을 판매하는 행위, 동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술주정과 난폭한 행동, 부당한 상행위 등이 처벌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병든 동료를 돌보지 않는 행위, 동료의 초상집을 찾지 않는 행위, 부고를 받고도 다른 동료에게 알리지 않는 행위까지 규율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오늘날 이러한 옛 형벌을 그대로 시행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벌칙 속에 담겨 있는 정신입니다.
그들은 조직원에게 이렇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돈만 벌지 말고 사람의 도리를 지켜라.
선배를 존중하고 동료를 배신하지 말며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외면하지 말라.”
이것이 보부상의 상도이며 예덕상무사가 이어받아야 할 정신입니다.
5. 나라가 어려울 때 보부상도 움직였다
보부상의 역사에는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격변 속에서 물자 수송과 군량 조달 등에 참여했다는 기록과 전승이 전해집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여러 사건 속에서 보부상 조직이 물자 운반과 정보 전달, 군량 조달 등에 참여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보부상 조직을 관리하는 국가적 기구들도 등장하였고, 시대에 따라 조직의 명칭과 제도도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보부상이 단순히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상인이 아니라, 강한 조직력과 정보망, 상호부조 정신을 갖춘 상인 공동체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6. 예덕상무사의 공문제는 단순한 제사가 아니다
예덕상무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데에는 선대를 받드는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문제입니다.
공문제는 단순히 제물을 차리고 절을 올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선대 보부상들이 지켜온 상도와 의리, 조직의 법통을 후손들이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신위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것은 죽은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지켜온 정신을 우리가 이어받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례의 절차 하나, 복식 하나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7. 전통복식과 장터풍장은 왜 지켜야 하는가
최근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 장사꾼들이 모두 똑같은 옷을 입었겠느냐.”
“풍물을 치는데 꼭 발까지 맞춰야 하느냐.”
“편하면 되는 것 아니냐.”
일상적인 장사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은 단순한 장사가 아닙니다.
전승입니다.
전승은 옛것을 아무렇게나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선대에서 내려온 복식과 의례, 동작과 질서 가운데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오늘 한 사람이 편의를 위해 하나를 바꾸고, 내일 또 다른 사람이 다른 하나를 바꾸다 보면 수십 년 뒤에는 원형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전통을 변경하는 일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8. 전통은 현 집행부의 소유물이 아니다
예덕상무사의 전통은 현 접장이나 단장, 사무국장 또는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초대 김상렬 접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선대가 지키고 물려준 공동의 문화유산입니다.
현재의 집행부는 그 전통을 일정 기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복식이나 의례, 공문제의 절차, 장터풍장의 원형 등을 변경하려면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기존 기록을 찾아보고, 선임 접장을 지낸 반수와 영위·두령 등 원로의 의견을 듣고, 필요한 경우 공식적인 논의와 의결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 자체가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9. 예덕상무사가 앞으로 가야 할 길
예덕상무사가 앞으로 100년, 200년을 더 이어가기 위해서는 세대가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원로는 후배에게 경험을 전해야 하고 후배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발전시키는 것과 옛것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통 위에 새것을 더할 수는 있어도 전통을 지워버리고 새것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옛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없애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 복장을 했는지, 왜 그런 절차를 만들었는지, 왜 그런 풍장을 쳤는지부터 연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 난 뒤에야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10. 신임 단원 여러분께
오늘 처음 예덕상무사의 문을 들어온 신임 단원 여러분께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예덕상무사에 들어왔다는 것은 단순히 행사 때 옷을 입고 풍물을 치며 공연에 참가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175년 동안 이어온 예덕상무사의 법통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할 전승자가 된 것입니다.
선배에게 배우십시오.
모르는 것은 물으십시오.
동료를 아끼십시오.
후배가 들어오면 따뜻하게 보듬어 주십시오.
행사장에서는 예의를 지키고, 복식과 행동 하나에도 예덕상무사의 이름을 걸고 있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의리와 신의입니다.
병든 동료가 있으면 찾아보고, 어려운 동료가 있으면 손을 잡아주며,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슬퍼하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대 보부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정신입니다.
10. 우리가 지켜온 50년의 전승을 우리 손으로 허물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저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예덕상무사의 놀이와 전승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예덕상무사의 놀이 형태를 처음 만들고 그 기틀을 세우신 분은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내셨던 윤규상 두령님이셨습니다.
윤규상 두령님을 비롯한 당시의 선배들은 단순히 옛 장사꾼의 모습을 흉내 내는 놀이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져 가는 보부상의 역사와 정신, 복식과 규율을 후손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50여 년 동안 수많은 선배 단원들은 예덕상무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뜻깊은 것은 그 전승의 맥이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보부상 4개 단체의 회장을 맡고 계시며 예덕상무사 반수이신 윤철현 반수님은 윤규상 두령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세대가 지켜온 보부상의 전통을 아들 세대가 이어받고, 다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전승(傳承)**입니다.
미투리 한 켤레에도 50년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복장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미투리를 신고 패랭이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투리 속에 신는 양말까지 반드시 흰색으로 맞추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겠습니까?
단순히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덕상무사의 놀이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공연이 아니라 선대 보부상의 모습을 후대에 전하는 전승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쯤 다른 신발을 신어도 되겠지, 양말 색깔 하나쯤 달라도 되겠지, 풍장을 치면서 발을 맞추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선배들이 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예덕상무사의 모습이 과연 남아 있었겠습니까?
작은 원칙 하나하나를 지켜왔기 때문에 오늘의 예덕상무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미투리 한 켤레에는 50여 년의 전승 역사가 들어 있고, 패랭이 하나에도 선배들의 땀과 자존심이 배어 있습니다.
전통을 바꾸는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합니다
전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몇 사람의 생각만으로 오랫동안 지켜온 복식과 규율을 쉽게 변경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예덕상무사가 문화유산으로서의 역사성과 전승 가치를 인정받으려 노력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무형유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전승되어 왔으며, 무엇을 지켜왔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50여 년 동안 선배들이 미투리와 패랭이, 흰 양말 하나까지 지키려고 애써왔는데 우리가 지금에 와서 그 원칙을 가볍게 바꾼다면 후대의 단원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전통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오늘 미투리를 바꾸고 내일 패랭이를 바꾸고, 다음에는 복장을 바꾸고, 그다음에는 풍장과 의례까지 편리한 방향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면 어느 순간 원형은 사라지고 이름만 예덕상무사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예덕상무사 규율과 법 적용 사례의 역사적·현대적 의미
상무사 법정(임소)의 역사적 엄격성
과거 보부상 조직은 자체적인 재판 체계인 ‘상무사 임소(任所)’를 두고 회원 간의 분쟁이나 규율 위반을 직접 심판했습니다.
상도의를 어기거나, 단체의 목적과 명예를 실추시킨 자, 동료 간의 신의를 버린 자에게는 곤장을 치는 봉벌(棒罰)부터 단체에서 완전히 매장하는 제명 및 징계(출교/상판을 엎는 행위)까지 매우 엄격하게 법을 적용했습니다.
정관 제9조 2항과 실효적 자치권
목적 위배 행위에 대한 경고 및 제명조항이 성문 정관에 명시되어 있고, 실제로 이를 적용하여 징계한 정식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예덕상무사가 명목상의 단체가 아닌 실제적·법적 자율 규율권을 행사하는 조직임을 증명합니다.
이는 구성원 개개인에게 상무사의 전통과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각심을 주며, 조직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수많은 전통 상인 단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예덕상무사가 오늘날까지 맥을 잇고 충청남도 무형유산 지정 등을 추진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이 ‘엄격한 자정 능력과 규율’에 있습니다.
숭고한 보부상 정신과 사대강령, 상악(장터풍장) 등의 유산이 흐트러지지 않고 전승된 것은 이러한 철저한 규칙 준수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원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어느 개인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덕상무사의 전통만큼은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달라고 호소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신고 쓰는 복식은 우리의 개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선대가 우리에게 잠시 맡긴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내려온 복식이나 의례를 변경해야 할 사정이 생긴다면 먼저 그 유래와 기록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역대 접장을 지낸 반수와 영위·두령 등 원로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단원들과 논의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고집이 아닙니다.
선대에 대한 예의이며 후대에 대한 책임입니다.
윤규상 두령님을 비롯한 선배들이 반세기 동안 애써 지켜온 예덕상무사의 전승이 우리 세대에서 훼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예덕상무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때 후배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선배님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전통을 잘 지켜주셨기에 우리가 오늘 이 모습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 예덕상무사 단원인 우리가 선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맺는말
보부상은 단순한 장돌뱅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법도가 있었고 질서가 있었으며 신의와 의리가 있었습니다.
병든 동료를 돌보고 죽은 동료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스스로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자신들의 행동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우리 예덕상무사가 오랜 세월 이어왔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옷 한 벌이나 풍장 한 가락만이 아닙니다.
그 속에 담긴 선대의 정신과 예덕상무사의 법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편리함 때문에 전통을 버려서는 안 되고, 몇 사람의 판단으로 오랜 세월 이어온 원칙을 쉽게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전통은 우리가 잠시 맡아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후대에 돌려주어야 할 유산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 바꾸면 후손들은 잘못된 것을 전통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덕상무사의 모든 단원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선대가 물려준 예덕상무사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선배는 후배를 보듬고, 후배는 선배를 공경하며 서로 의지하고 화합한다면 예덕상무사의 175년 역사는 앞으로 200년, 300년을 넘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대 보부상들이 맡긴 책무이며,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예덕상무사의 정신입니다.
예덕상무사 반수 전대환
예덕상무사 신입단원 전승교육 제2강
보부상놀이 대사·가사·타령복사 가능한 교육용 편집본
편집자 강사 전대환 반수
원전: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저자·교육: 예덕상무사 반수 전대환※ 모든 본문을 그림이 아닌 실제 글자로 입력하여 복사·수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1. 제2강에서 다룰 전체 종목
ᄋ 제1마당 - 풍물입장 / 보부상타령(성수만세) / 알림소리 / 고사문 / 대감놀이 / 권접용지 발표 / 의병을 구하다(상황극)
ᄋ 제2마당 - 소금장수 / 옹기장수 / 새우젓장수 / 담배장수 / 엿장수 / 떡장수 / 약장수(밀양아리랑·죽방울타령) / 뱀장수(약장수타령)
ᄋ 제3마당 - 장문놀이 / 길쌈놀이 / 상여놀이
ᄋ 뒤풀이 - 엿장수 뒤풀이 / 각설이타령 / 사물놀이
2. 추가 전승노래 - 계화
교육방법: 선창자가 한 소절을 부르면 전원이 후렴을 받는다.
1. 태조 대왕 등극 후에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2. 우리 생명 건져 냈소.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3. 영위 영감 반수 영감 듣잡시오.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4. 시재 영감 요중 영감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5. 모시고서 들어갑니다.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6. 오늘이 몇 날이냐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7. 삼월 열나흘입니다.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8. 우리가 살면 몇 백 년 사나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9. 목숨을 다하여 보은충성 다하세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10. 산천초목은 젊어나 가는데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11. 우리네 인간들은 왜 이리 늙나요.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12.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세.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3. 성수만세
만세문에 성수만세 오르는 장에 관청이요
다음 장에 만방이요
한편 숙장 매장처도 수천 방석 재앙맞요! (새못하게)
가는 길에 단념이요 오는 길에 마방이요
꽃집장수 풍년장수 쓰고오다가 담가슴하네!
만세 만세 성수만세 (다같이 보부상! 도포 들고 크게 외친다)
4. 알림소리
“풍림장수 꽃집장수 보부상 여러분들 말허유~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은 3월31일 무슨 날유?~
오늘 우리 고을 영감 잔치가 있는 날이여유~
아! 두령영감, 접장영감 모시고 신명나게 놀아 봅시다~”
5. 고사축원
고사고사고사로다 고사축원을 받으시오!
반주: 덩개덩개 덩덩 덩개덩개 덩
서방정방 남방정방 동방 대한민국 중앙남도 예산군 덕산면
이 자리의 오신 여러분들!
과거에는 무병장수 사업번창 순조 재수 대통 하옵시게
예덕상무사 보부상 문화로부터 신년새해 맞이하여
신신조신 포조대인 용왕대신 주장대신 삼주대신께
고사축원을 올렸으니 고사 축원을 받으시오.
시화연풍 태평년은 태조대왕 등극 전에 두령영감 좌우로
지난 일 년은 지난 일이고 건강하게 살고 오래 사시며
평생동안 너르시고 신명나게 놀아보세.
신구영감 건강하고 재수대통 하옵시어 여기오신 여러분 가정에도
건강하고 재수대통 하옵시어 소원성취 이루소서.
6. 대감놀이
부채를 흔들며 마당을 한바퀴 돈다. “어~이”
이곳은 한바퀴 두르면 봤더니 무대구성이 오목이 그득하니
이곳이 바로 명당 자리였다! 얼쑤!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좋은 명당 자리는 항상 부정이
끼들기 마련이었다! 하!
이 부정을 몰아 내려면 영원하신 우리 대감님을 모시다 놓고
우렁찬 제창으로 삼재팔난 잡귀잡신 다~ 소멸시켜 주실 것이니
아!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보자!
(한바탕 뛰고 나서) “어~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영험하신 대감님께 비나이다.
오늘은 여기계신 여러분들과 보부상단원 모두 함께 영감 잔치를
하는 날이오니 고손 경상을 받아서 복드시게
그저 그저 무사 무탈하게 하여 주시옵고
천상 만상 많이 벌어 오르게 만드실 때요 빛을 비추어
만복이 깃들기를 바라옵니다.
7. 권접용지 배부·발표
여러분~ 여러분! 영감잔치가 끝이났으니 우리고을
새 접장 영감님 권접용지 전달을 하겠으니 각 지소 영감님
께서는 지표를 가지고 속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많이들 써왔나요? 자 그럼 권접용지 지표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
새 접장 영감이 되셨으니 한턱 내시고 거하게 지요.
마을주민: 아니 이 양반보게 새 접장님 한턱 좀 보여야 보리쌀
한톨이라도 더 얻어 먹어 이 양반아~
대중주민: 어이구 그것가지고는 어림도 없시유. 그러갔고 뭔 잔치를 한다유!
아 그러유니까? 여러분 안그러유? 시방~ (함성 웅성)
새 접장님 입장!
8. 의병을 구하다 - 상황극
새 접장이 선출되어 그 상으로 막걸리와 돼지 한마리를 낸다하니
목구니 때도 벗기고 고기로 포식을 하게 되었으니~
꽃집장수, 풍림장수 모두가 축제 분위기였다.
아! 신명나게 마당 놀이판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저쪽 반대 방향에서
일본군에 쫓기는 젊은이가 있었으니 원은 그리되 나름대로 살아왔던
부보상차림으로 손선군에 행상을 바꾸는데는 불과 수초간에 벌어진 일.
포착 소리와 함께 뒤에 등장한 왜군들은 의심이 가고 예외상 무사 간부
부보상들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을 특정 지역에서 발단해서 찬란되었다기 보다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시작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이 들고 일어섰던 민족운동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예덕상무사도 이러한 민족의 근원에 민낯하기나 순신처럼 그 역할을
묵묵히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나운서 멘트: 지금의 장면은 일본군에 쫓기는 의병을 마침 접장영감을 새로이
선출하고 풍에 먹은 보부상들이 사로잡히는 두려움이 신명나게
마당을 돌며 술사위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의심이라도 할듯
장대에 묶은 술과 장수를 들고 빙글 돌리므로 병사한 것으로
실제로 당시의 보부상들은 많은 의병과 독립군들을 숨던 또는
탈출을 도왔으며 당시의 보부상들은 장에서 벌어들인 녀석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기여했다는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9. 소금장수
얼씨구 좋다 얼씨구!
소금이 왔어요 소금 사슈~
이 귀한 소금은 어디다 쓰는고 하니
김장할때 쓰고! 소금 참 술과해
시골국물 비벼 밥 술에 소금 들어간다
무생채 할 때 소금 한가마
이렇게 여러모로 쓰실때가 많은 소금유~
소금을 팔아가슈~
제 소금 팔기전에 내 팔랑 한자락
해볼틴디 함 들어나 보실라우~
♪ 풍악세박자 (한바퀴 허리 돌며 분위기 유도)
새벽닭 저물고 아침이 밝아오니
소금장수 노독과 바스스 만나서
오늘은 소금팔아 또순이되었네
구루신도 사갔다고 은봉을 뒤졌었네
소금장수는 늘게 빠져유로 부상하네
이리 저리 거리 시장 정겹다리 건너다가
아이고 어깨 온몸이니 돌아오면 고독했지
허허 이제 팔렸구나 장가 가기 틀렸구나
소금사슈 소금이유~
10. 옹기장수
항아리 사유 항아리~
반질반질 예쁘고 단단한 항아리가 왔시유~
소금이고 된장이고 어느 항아리가 부식하면 뿌우게 떠서 변질이라도
돼버리면 일년 열두달 밥상머리에서
항아리지 장독인지 모르다며 시어머니에 사랑까지 구박받는댜~~~
아! 안되는 말인게 간디~
아! 오늘 이곳에 가시는 분들께서는 영성스럽
구원진 그야말로 자연산 오줌같은 바다라 천연 옹기니
있을때 장바구니 하나씩 사유!!!
옹기사러 독아지왔어요 옹기사러 독이 왔어요
이 옹기는 흙으로 만든 옹기인데 음식맛을 내주는 옹기이고
된장찌개 뚝배기는 옹기가 맛이 나지유
옹기 팔러 왔으니 옹기팔러 갑니다.
옹기사러 옹기요 뚝배리진 뚝배기 독사러
옹기사러 옹기요 뚝배리진 뚝배기 독사러
11. 새우젓장수
새우젓 사러 곰새젓 사러!
조물에 담은 새우젓은 새우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오뉴월에 잡은 것은 육젓이요
가을에 담은 것은 추젓이요
겨울의 새우로 동백젓이요
전라도 법성포의 풍장젓이요
서산의 어리굴젓이요
그밖에도 각종 젓갈이 많다는 것이오!~
세월따라 오뉴월에 배중선에 담고 한 겨울 초치국에도 좋은 어리굴젓이요
새우젓이요 새우젓 사시오!~
12. 담배장수
귀하 귀한 담바귀야
황성에 예산에 담바귀야
온갖 조리 나왔느냐 금을 주려 나왔느냐
온돈 없고 금돈 없어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담바귀 씨를 흩어
낮이면 햇빛을 받고 밤이면 달이슬 맞아
무성하게 자라난 후에
속에는 속잎은 담제치 찍고 속에 속내를 베어다가
청명 하루 베년해 피워
청년 후울이 근본 것라나
곰바귀 한 대 피워보자~
13. 엿장수 - 가사
엿을 사시오 엿을 사, 달고나 맛있는 엿을 사유.
충청도는 찹쌀엿, 엿을 팔러 나왔슈.
이 엿을 잡수시면 장수하는 엿이유.
모두 모두 오시오, 엿맛을 보시유.
경기도는 호두엿, 달고 고소한 호두엿.
울릉도라 호박엿, 산후조리 애기 엄마는 호박엿이 제일이구유.
속이 냉한 여인네는 구절초 수수엿이 제일이구유.
해소기침 심한 데는 도라지 은행엿이 제일이구유.
연인끼리 속삭일 때는 깨엿 콩엿이 맛있구유.
강원도는 강냉이엿, 경상도는 지장엿, 제주도는 좁쌀엿.
전국 각처 팔도엿이 다 있어유. 맛들 보고 사가시유.
아주 맛있는 엿이유.
14. 떡장수
3~4월 쑥쑥은 쑥떡에 맞고요
5~6월 수리치는 수리치 쑥떡에 맞았구요
인절미 찰무리 쑥떡으로 치던 들어 제일이구
팔월 한가위 추석에는 송편떡이 맛있구요
가을 햇곡식에 기증떡을 만들고요
동지날 팥죽 입춘에는 포근포근한 백시루떡
신년 새해 해에는 흰떡국 가래떡이 맛있구요
고물에 떡을 일제하게 밀고 돌아 아침된다~ 하이
쑥떡을 먹는 날이 자식들은 있겠다는~ 얼쑤~
저 팔아서 5남매 대학 공부 다아 마치고 시집장가 거덩 다 보내구
이제 하나 남은 막내 녀석이 아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또 회사에 취직이 됐단하니~ 아이구 세상에
이런 경사가 어디 있겠슈! 허먼~
아! 그러하니 내 늙은 떡 그날 드리기는 거시기하고 벌이 써서
팥고물로 찰떡이나 해시유?~ 어여 잡시오, 나두유~
15. 약장수 - 대사와 노래
자~ 약장수가 왔어요.
이 약장수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녀. 장이면 장마다 오는 게 아녀.
오늘 장에 아주 좋은 명약을 가지고 왔으니 잘들 들어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 예산 오리동에 맹재명이라는 사람이 고약을 고아서 파는데, 이 약을 팔려면 사람을 모아야 하는데 모을 재간이 없어 죽방울 놀이를 해서 사람을 모이게 하는데:
죽방울이요 죽방울, 죽방울이요 죽방울. 하늘을 날으는 죽방울이요. 땅에 떨어지면 땅방울이라.
네놈의 팔자가 죽방울이라. 땅에 떨어지면 못 사느니라.
이렇게 해서 사람을 모아놓고 약을 팔기 시작하는데 염병땜병, 가슴앓이, 속병, 물 한 컵만 먹어도 꺼어걱 대는 사람, 밥 먹고 체했다 고기 먹고 체했다 하시는 분, 만만한 가슴만 치지 말고 이 약 한번만 갖다가 먹어봐. 막힌 하수구멍 뚫리듯 뻥 뚫려.
논밭에 가서 일을 하라치면 다리가 아프다 허리가 쑤신다 팔이 아프다 하시는 분, 이 약 한번만 갖다 붙여봐. 붙이는 즉시 시원하게 싹 나서 버려.
아이들이 엎어지고 자빠지고 머리가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데, 얼굴에는 면종, 목에 나는 후발종, 등에 나는 등창, 겨드랑이에 암캐종, 배꼽 밑에 부랄창, 사타구니 숫캐종, 똥구멍에 치질, 발가락에 무좀. 가렵고 근지럽고 사람 미치고 환장하는데 걱정 하나도 할 것 없어. 이 약 한번만 갖다가 발라봐. 시원하게 싹 나서 버려.
이 약도 바르면 낫고 안 바르면 안 나서.
아아~ 이렇게 약장수가 약만 팔 게 아니고 노래를 한번 불러봐야 하는데 이 약장수는 노래는 못해. 창가나 한번 불러봐야겠어.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 이 약장수가 노래만 부르고 있으면 우리 어린 새끼들 다 굶어죽어. 그러나 저러나 영감인지 땡감인지 집 나간 지가 석 달 열흘이나 되었는데 집에 들어올 줄을 몰라.
어디 가서 약을 파는지 딴살림을 차렸는지 집에 새끼 마누라가 궁금하지도 않은가봐.
(이때 뱀장수가 등장하며) “여보 마누라! 내가 몇 날 며칠 집에 안 들어올 때엔 다 이유가 있어. 바로 이것 때문이여~.”
16. 뱀장수 - 대사와 노래
뱀장수가 나왔어. 내가 집 나가서 여러분 못 들어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지~ 바로 이것 때문이었지.
마누라: 아니 이게 뭔데요? 아이구 머리나!
뱀장수: 이게 그 뱀 잡으러 다닌 거여. 뱀에 물어 죽는 것도 아니고 뱀 잡는 사람~
그래 이 뱀이 많았어. 아이구 물리지 않았나 모르겠네.
물리지 않았으면 다행이여.
자! 그러면 이놈들은 한번 팔아 볼 텐데 이놈이 어떤 놈이냐. 이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해저 침천산을 돌아서 높은 곳 에덴동산에 한번 올라가면 일 년 열두 달 한 번도 못 내려오는 뱀이야.
물었다 하면 병원에 갔지만 고단하는 그 무시무시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뱀이란 말이야.
자 그리고 이것은 뱀장수 수십 년을 하면서 말로만 듣던 백사란 놈도 잡았지.
그런데 이건 말이야 가야산 그 깊은 산속에서 물에 빠지고 하는 것도 먹고 사는 놈이라 말여.
자! 이놈을 내가 왜 가지고 나왔는지 말하자면, 이 뱀이 말이지 자다가 말이야. 날씨가 춥다 보면 그냥 벌떡 일어나 가지고 쇠를 먹은 놀이는 사람 그리고 거시기나 다할 바닥 구부러져 가지고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
아따 요게 좋아부러라! 일어 여기여 힘깨나 쓴다는 사람 다 나와 봐봐. 다 나와서 일으켜 보란 말이여.
그러나 요거 힘으로는 좀 딱 하나 있어 버려. 그놈이 놀이야. 놀이야. 핫 힘을 한번 쫙 주고 다 쓸어내려봐.
아따 뿌듯하니 힘껏 들고 아따 그거 완전 좋다 이 말이야.
자! 그리고 말이야 이놈이 아침 밥상부터 끝날 때까지 뱀과 하려면 아프 오줌 줄기가 말이야 쫙 뻗어.
잠깐을 못 보셨던데 그 단단하다는 스텐 요강도 뚫을 기세라.
자! 그래서 우리 마누라 이것 보았어여 여기 뱀이 어제밤 말여.
깜짝도 나서 들다 하는데 어쩌 박수를 좀 쳐봐.
워메 무슨 박수 소리가 좋은 송장 같기 소리보다 못해버려~
아! 박수 소리가 작다 그말이여!
여러 다시 한번 쳐 봐~ 아우아아!
자 마누라 여기 계신 여러분들한테 노래나 한번 불러 드리고 갑시다!
(쑥대머리 기본으로) ♪ 비명 공허공 명기적 대적이~ / ♪ 아 희야 왔어요~ / ♪ 몸에 좋은 뱀이 왔어요 / ♪ 이 약을 잡수시면 어려진다 / ♪ 만수무강 합니다 / ♪ 여기 오신 여러분 모두모두 / ♪ 좋은 일이 있으시고 / ♪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 / ♪ 가족하고 삽니다.
17. 장문놀이 - 대사
행수: 왜이리 소란하냐.
점사에서 왔자기며 하는 소리가 나며 도둑이요~ 하고 외쳐댄다.
행수: 점사를 끌어 오너라.
점사(도둑)를 끌고 오면
행수: 장문을 설치하라.
(촉작대 두 개를 세우고 새끼줄을 연결하여 장문이 설치되면 행수의 조사가 이뤄진다.)
행수: 우리 부보상은 처지는 불우하나 서로 돕고 의지하며 명분이 좋으며 장사 지내주고 함께 살아주니 사해지내가 형제이다. 절도자로부터 잡힌 행인의 돈궤로 4가지 계명이 있다.
첫째: 행언하지 말 것이며, 둘째: 행패를 부리지 아니되며, 셋째: 술만해서는 아니되고, 넷째: 도박을 해서는 더욱 아니된다.
점사는 넷째에 해당함으로 통하게 다스리겠다.
‘태 30도로 통하게 다스리고 행상을 할 수 없게 채장을 빼앗고 밖으로 내쳐라.’
점사: 행수공으로 전 부장한 선물이 그렇지 어쩌구… 피할 수 있겠습니까?
행수: 내 죄심이 그리 하다니 그렇구나.
점사: 죄심이 아니면 벌써 절망함을 놓았겠지요.
행수: 점사의 행패로 불허하게 행상을 놓아라.
점사: 그러면 사과하겠소. 요즘 세상이 말로는 원은 건데…
행수: 모양을 내려라. (장면에 문을 벗는다)
행수: 거방하여라. (점자를 형상에 엎드리게 하고 곤장을 친다)
행수: 그만 거방하여라. 토박놀이 신조를 잘 지켜 가도록 하며 대신 채장을 찾도록 하여라.
18. 길쌈놀이 - 가사
선창: 가세가세 장사가세 / 후렴: 가세가세 장사가세
오동장에 한방벌고 / 다음장에 만냥벌고 / 후렴: 가세가세 장사가세
이장에서는 저장으로 / 저장에서 이장으로 / 후렴: 가세가세 장사가세
태조대왕 등극후에 / 우리생명 건져냈소 / 후렴: 가세가세 장사가세
풍무니에 짐신들고 / 동짐지고 못짐이고 / 후렴: 가세가세 장사가세
두령영감 덕분으로 / 우리가 잘팔아네 / 후렴: 가세가세 장사가세
굴어보세 굴어보세 / 굴방태를 굴어보세 / 성명-위 소집을 반복해서 부르는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응용해서 부르기도 한다.
19. 엿장수 뒤풀이
엿을 사시유 엿을 사, 달고나 맛있는 엿을 사유!~
충청도는 찹쌀엿, 엿을 팔러 나왔슈!~
이 엿을 잡수시면 장수하는 엿이유!~
모두 모두 오시어 엿맛을 보시유!~
경기도는 호두엿, 달고 고소한 호두엿.
울릉도라 호박엿. 산후조리 애기엄마는 호박엿이 제일이구유.
속이 냉한 여인네는 구절초 수수엿이 제일이구유.
해소기침 심한 데는 도라지 은행엿이 제일이구유.
연인끼리 속삭일 때는 깨엿, 콩엿이 맛있구유.
강원도는 감자엿, 경상도는 지장엿, 제주도는 좁쌀엿.
전국 팔도엿이 다 있시유~~ 맛들 보구 사가시유!~
아주 맛있는 엿이유!~ 아주 맛있는 엿이유.
엿사시오~ 엿을 사~ 팔도강산 굽이굽이 굽은 엿이유~ 엿먹어유~
20. 교육 진행 요령
1. 첫째, 악보가 없는 대사는 먼저 말하듯 읽어 뜻과 억양을 익힌다.
2. 둘째, 노래가 섞인 대목은 대사와 노래를 구분하여 표시하고 선창·후창으로 나눈다.
3. 셋째, 장수놀이는 물건을 실제로 들고 호객 동작을 함께 연습한다.
4. 넷째, 장문놀이는 행수·점사(도둑)·보조역으로 나누어 규율의 의미를 먼저 설명한 뒤 연기한다.
5. 다섯째, 책의 옛 말투와 충청도 사투리는 전승의 특징이므로 가능한 한 원형을 살려 지도한다.
편집 주의: 원전의 옛 말투와 구어 표현을 최대한 살려 옮겼습니다. 원본이 사진·인쇄 상태로 흐리거나 판독이 애매한 부분은 교육 전에 선생님이 실제 전승 대사와 대조하여 최종 확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2부 원전 악보집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수록 악보 12종
성수만세 · 고사축원 · 대감놀이 · 엿장수 · 옹기장수 · 새우젓장사 · 담배장수 · 떡장수 · 약장수(죽방울) · 짚신장수 · 길쌈놀이 · 각설이타령
※ 앞부분의 사설·대사·가사와 함께 보면서 연습하도록 한 권으로 묶었습니다.
추가 전승곡 〈계화자 소리〉
행진곡풍 새 선율 - 전승 가사와 함께 연습
전체 가사
1. 태조 대왕 등극 후에
2. 우리 생명 건져 냈소.
3. 영위 영감 반수 영감 듣잡시오.
4. 시재 영감 요중 영감
5. 모시고서 들어갑니다.
6. 오늘이 몇 날이냐
7. 삼월 열나흘입니다.
8. 우리가 살면 몇 백 년 사나
9. 목숨을 다하여 보은충성 다하세
10. 산천초목은 젊어나 가는데
11. 우리네 인간들은 왜 이리 늙나요.
12.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세.
공통 후렴: 계화, 계화, 계화자 좋소
부르는 법: 각 절을 선창한 뒤 전원이 공통 후렴을 받습니다. 마지막 12절 뒤에는 후렴을 두 번 반복하고 마지막 “좋소”를 길게 뻗어 마칩니다.
제3강
예덕상무사 보부상놀이의 복원과 전승
― 윤규상 두령의 발자취와 우리가 지켜야 할 정신 ―
강사 : 윤철현 반수
충남보부상협의회 회장
1. 강의를 시작하며
단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제3강에서는 우리가 공연하고 있는 예덕상무사 보부상놀이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는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보부상의 정신과 전통을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에게 오늘 이 강의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 부친인 고(故) 윤규상 두령께서는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으시면서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보부상 문화의 보존·전승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특히 사라져가던 보부상놀이를 다시 찾아내고 정리하여 후세에 전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단순히 한 사람의 강사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선대가 지켜온 예덕상무사의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2. 예덕상무사 보부상놀이는 무엇인가
보부상은 단순히 물건을 등에 지거나 보자기에 싸서 팔러 다니던 장사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보상(褓商)은 비교적 가볍고 값진 물건을 보자기에 싸거나 질빵에 메고 다녔으며, 부상(負商)은 생활용품처럼 무겁고 부피가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장터를 다녔습니다.
이들은 장시를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경쟁하기도 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신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병구사장(病救死葬)
환난상구(患難相救)
입니다.
동료가 병들면 서로 돕고,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러주며,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한다는 정신입니다.
보부상에게 동료는 단순한 장사 동료가 아니었습니다.
먼 길을 함께 걷고, 굶주림과 추위를 함께 견디며 생사를 같이했던 형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덕상무사의 역사는 장사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의리와 신의, 질서와 화합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라질 뻔했던 보부상놀이를 다시 살리다
현재 전승되는 예덕상무사 보부상놀이는 옛 보부상들의 생활과 조직문화를 현대에 복원·재현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975년 11월 당시 생존해 있던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보부상놀이가 다시 재현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처음부터 모든 놀이를 새롭게 만들었다고 보기보다는, 당시 살아 계셨던 보부상들의 기억과 전승을 바탕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복원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합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분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윤규상 두령이었습니다.
부친은 삽교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74년 예덕상무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후 예덕상무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나중에는 두령을 맡아 보부상 문화의 보존과 전승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보부상놀이의 재현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교에 보부상놀이 재현반을 만들었습니다.
그 노력은 지역 행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보부상놀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도 공연되면서 예덕상무사의 보부상 문화를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매헌문화제에서도 보부상놀이가 공연되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단순한 공연 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고장의 작은 장터에서 이어지던 보부상의 문화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행사에까지 나아갔다는 것은 예덕상무사의 역사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4. 보부상놀이에는 역사가 들어 있다
보부상놀이는 단순히 웃고 즐기는 민속놀이가 아닙니다.
현재 전해지는 놀이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제1부 ― 전승과 여흥
재수굿, 영감영접행진놀이, 광대놀이, 공문제, 새접장 귀임행진놀이, 보부상 간 인사놀이 등이 포함됩니다.
여기에는 예덕상무사의 위계질서와 선후배 관계, 공문제를 중심으로 한 전승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제2부 ― 난전과 타령
보부상들이 봇짐과 등짐을 풀어놓고 장터에서 물건을 파는 모습을 재현합니다.
새우젓타령, 담바구타령, 각설이타령, 엿장수타령 등 다양한 장터의 소리와 흥이 펼쳐집니다.
이것은 옛 장터의 모습을 후대 사람들이 직접 보고 느끼도록 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입니다.
제3부 ― 규율과 봉사
장문법과 사발통문 등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보부상이 단순한 장사꾼 집단이 아니라 엄격한 규율을 갖춘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에는 우리가 배우고 있는 「계화자」 소리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화자」 한 곡을 부르는 것도 단순히 노래 한 곡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담긴 선조들의 삶과 애환, 화합의 정신을 함께 이어가는 것입니다.
5. 보부상이 목숨처럼 지킨 규율
보부상은 자유롭게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녔지만 조직 안에서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지켰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계명(四誡命)**입니다.
첫째, 물망언(勿妄言)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둘째, 물행패(勿行悖)
행패를 부리지 말라.
셋째, 물음란(勿淫亂)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넷째, 물도적(勿盜賊)
도둑질하지 말라.
이 네 가지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되새길 가치가 있습니다.
예덕상무사의 이름을 달고 밖에 나가는 순간, 개인의 행동은 개인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곧 예덕상무사의 얼굴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배는 후배를 아끼고 가르쳐야 하며, 후배는 선배를 존중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6. 보부상의 핵심 정신 ― 환난상구
옛 보부상에게는 오늘날처럼 병원도, 보험도, 사회보장제도도 없었습니다.
장사를 나갔다가 객지에서 병들면 생계 자체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보부상들은 서로를 지켜주었습니다.
병든 동료를 돌보고, 죽은 동료의 장례를 치러주고, 어려움이 닥치면 함께 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병구사장·환난상구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예덕상무사가 가장 소중하게 계승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부상의 옷만 입는다고 보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패랭이를 쓰고 미투리를 신고 지게를 진다고 해서 보부상의 정신까지 저절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동료를 존중하고, 어려운 단원을 돕고, 선배를 공경하고, 후배를 보살피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보부상의 정신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7. 내포보부상촌에 담긴 윤규상 두령의 꿈
부친 윤규상 두령이 평생 중요하게 생각했던 또 하나의 사업이 내포보부상촌 건립이었습니다.
부친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보부상의 역사와 문화를 한곳에 모아 후손들에게 보여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주장했습니다.
보부상촌을 단순한 민속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보부상을 우리나라 유통경제의 원형으로 바라보고, 과거의 보부상과 현대의 유통산업을 연결하여 교육하고 연구할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2013년 보부상촌 건립계획이 본격적으로 발표됐을 때에도 고령의 몸으로 직접 현장에 나서 그 필요성을 알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내포보부상촌에는 이처럼 수많은 선배들의 오랜 노력과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설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 보부상촌을 만들려고 했는지, 그곳에 무엇을 담아 후손들에게 전하려 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8.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으며
저는 윤규상 두령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일을 자랑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 세대가 어렵게 지켜온 것을 우리가 제대로 지켜 후대에 넘겨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선대가 어렵게 복원한 보부상놀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편의에 따라 하나둘씩 변한다면 언젠가는 원형을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통문화는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전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를 알고, 기록하고, 가르치고, 다음 세대가 다시 그대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전통이 됩니다.
복식 하나, 패랭이 하나, 미투리 하나, 지게 하나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공문제를 올리는 절차에도 이유가 있고, 선배와 후배가 예를 갖추는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을 변경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개인의 편의나 몇 사람의 생각만으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충분한 고증과 기록을 살피고 선배들의 의견을 듣고, 조직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조들에 대한 예의이고 후손에 대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9. 오늘의 단원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단원 여러분께 몇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공부해 주십시오.
둘째, 보부상놀이의 동작만 외우지 말고 그 동작과 대사가 왜 생겼는지를 알아주십시오.
셋째, 선배는 후배를 따뜻하게 가르치고 후배는 선배에게 예의를 다해 주십시오.
넷째, 복식과 소품, 노래와 대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함부로 바꾸지 말아주십시오.
다섯째, 단원 사이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옛 보부상들이 목숨처럼 지켰던 환난상구의 정신입니다.
10. 맺는말
“전통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지켜서 물려주는 것이다”
단원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선조들이 걸었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윤규상 두령을 비롯한 선배들은 사라져가던 보부상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찾아 기록하고 놀이로 재현하여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그 다음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는 책과 사진으로만 예덕상무사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배우고, 기록하고, 공연하고, 후배에게 가르친다면 예덕상무사의 정신은 앞으로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전통은 옛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지켜온 정신과 원칙을 오늘의 우리가 지키고, 그것을 다시 다음 세대에 온전히 넘겨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윤규상 두령의 세대가 우리에게 그 길을 열어주었다면, 이제 우리 세대는 그 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 역시 예덕상무사 반수로서, 그리고 충남보부상협의회 회장으로서 선대가 남긴 보부상 문화와 정신을 지키고 후대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원 여러분께서도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배는 후배를 보듬고,
후배는 선배를 공경하며,
어려움에는 서로 돕고,
전통 앞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덕상무사가 오늘까지 살아남은 힘이며,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보부상의 정신입니다.
감사합니다.
제3강 핵심 교육어
병구사장(病救死葬)― 병든 동료를 돕고 죽은 동료의 장례를 함께한다.
환난상구(患難相救)― 어려움과 재난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
사계명(四誡命)― 물망언·물행패·물음란·물도적.
쟁(爭)과 화(和)― 선의의 경쟁을 하되 조직 안에서는 서로 화합한다.
전승(傳承)― 선조에게 받은 전통을 올바르게 익혀 다음 세대에 전한다.
오늘의 한마디
“전통은 우리가 잠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에게 빌려 후손에게 돌려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이 원고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윤규상 두령의 공적을 역사자료와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자료에는 1975년 11월 생존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놀이가 다시 시작됐다고 되어 있으므로 붙여넣은 텍스트(1), ‘윤규상 두령이 혼자 창설했다’보다는 **‘복원·재현과 체계적인 전승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실제로 학교 재현반을 만들어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개막식까지 공연을 확대한 사실도 확인됩니다.
또한 보부상촌 역시 윤규상 두령이 오랫동안 건립 필요성을 주장해 온 것으로 자료에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태조 이성계와 보부상(부보상)
― 조선 건국 설화에서 보부상 조직의 역사적 정체성까지
1. 보부상과 조선 건국의 인연
우리 보부상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보부상의 시조로 전해지는 **백달원(白達元)**이다.
보부상은 물건을 등에 지고 다니는 **부상(負商)**과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는 **보상(褓商)**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행상의 역사는 조선보다 훨씬 오래되었지만, 보부상 전승에서는 조선 건국을 전후하여 백달원을 중심으로 조직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전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백달원을 **“조선전기 보부상단의 시조로 여겨지는 상인”**으로 설명한다.
다만 백달원과 이성계의 구체적인 관계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직접 확인되는 내용이라기보다 보부상 문서와 후대의 전승을 통해 전해지는 부분이 많으므로, 역사적 사실과 전승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백달원과 이성계의 전승
보부상 사회에는 백달원과 이성계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표적인 전승은 고려 말 이성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달원이 그를 구하거나 도왔으며, 이후에도 백달원과 그를 따르던 행상들이 이성계를 지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태조가 즉위한 뒤 안변의 석왕사를 증축할 때 백달원이 동료 80명을 이끌고 자재와 식량을 운반하고, 500나한을 옮기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 공로를 인정한 태조가 행상들을 보호하고 **임방(任房)**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백달원에게 옥도장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전승 때문에 백달원은 후대 보부상들에게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보부상 조직의 시조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3. 왜 보부상이 중요했는가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도로·철도·택배·통신망이 없었다.
따라서 전국의 장시와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단순히 물건만 파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첫째, 물자를 운반했다.
소금·생선·옹기·목기·농기구와 같은 생활필수품을 산간벽지까지 운반하였다.
농민이 생산한 물품을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 판매하기도 했다.
따라서 보부상은 생산자와 소비자, 농촌과 장시를 연결하는 민간 유통망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둘째, 소식을 전달했다.
보부상은 여러 고을과 장터를 돌아다녔다.
어느 지역에 흉년이 들었는지, 어느 장터에서 어떤 물건이 부족한지, 지역 민심이 어떠한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보부상의 이동망은 물류망인 동시에 정보 전달망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위기 때에는 수송 능력을 발휘했다.
등짐과 지게를 지고 험한 산길을 오랫동안 이동하는 것은 부상들의 일상이었다.
이러한 이동 능력과 조직력은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 때 물자와 식량을 운반하는 데 활용될 수 있었다.
후대 보부상 문헌에는 조선 건국 과정뿐 아니라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국가적 위기 때 보부상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했다는 전승이 이어진다.
4. 임방(任房) — 보부상의 조직적 기반
보부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 **임방(任房)**이다.
임방은 각 지역 보부상들이 모이고 업무를 처리하는 조직의 거점이었다.
보부상들은 임방과 상무사 조직을 중심으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구성원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또한 동료가 병들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돕고, 사망하면 장례를 돕는 등 강한 상부상조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보부상 조직은 단순한 상인들의 친목단체가 아니라
상업 조직 + 생활공동체 + 상호부조 조직
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5. 보부상의 정신 — 충효와 신의
보부상은 장사를 하기 전에 사람 사이의 신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전통적으로 보부상 사회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규율과 계율이 전승되었다.
그 중심 정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나라에는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동료에게 신의를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서로 돕는다.
보부상에게 신용은 곧 생명이었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속여 팔면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보부상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부상 사회에서는 개인보다 조직의 명예와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6. 패랭이와 목화송이에 담긴 태조 전승
보부상의 대표적인 복식 가운데 하나가 패랭이이다.
특히 패랭이에 목화송이를 달았던 유래를 태조 이성계와 연결하는 전승이 있다.
이성계가 전장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 백달원 또는 그 일행 가운데 면화를 취급하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솜으로 응급처치를 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보부상들이 패랭이에 목화송이를 달았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패랭이와 목화송이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보부상 사회에서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표지로 전승되어 왔다.
7. 역사적 사실과 전승은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보부상의 역사를 후손에게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있다.
전승을 소중히 여기되, 전승을 무조건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달원이 태조 이성계를 구했다는 이야기, 위화도 회군을 지원했다는 이야기, 태조가 보부상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었다는 이야기 등은 보부상 관련 문헌과 후대 전승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모든 내용이 태조 당시의 1차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대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8. 태조와 보부상 관계의 역사적 의미
태조 이성계와 보부상의 관계를 단순히
“왕이 보부상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라고만 이해해서는 부족하다.
당시 국가에는 전국을 빠르게 연결하는 현대적인 교통·통신망이 없었다.
반면 행상들은 장시와 마을을 연결하면서 물자와 정보를 이동시켰다.
따라서 국가와 행상 조직은 서로 필요로 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국가는 상업과 유통 질서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행상들은 안전하게 장사하고 서로 보호받을 조직이 필요했다.
이러한 관계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보부상 사회에서는
“우리는 나라와 함께해 온 상인 조직이다.”
라는 강한 역사적 정체성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9. 예덕상무사와 백달원
이 역사는 오늘날 예덕상무사와도 직접 연결된다.
예덕상무사는 예산·덕산·면천·당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상무사이다.
특히 예덕상무사에서는 보부상의 시조로 전해지는 백달원을 매우 중요하게 모시고 있다.
백달원의 위패에는
「頭目白兔將軍達元先生神位」
두목백토장군달원선생신위
라고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백달원이 오늘날까지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정신 속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적 증거이다.
10. 우리가 지켜야 할 것
보부상의 역사는 단순히 옛날 장사꾼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등에 지게를 지고 수십 리, 수백 리 길을 걸으며 물건을 날랐고, 서로를 도우며 조직을 지켜왔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신의(信義)
상부상조(相扶相助)
충효(忠孝)
공동체 정신
이다.
오늘날 우리가 패랭이를 쓰고, 미투리를 신고, 전통 복장을 갖추고, 공문제를 올리고, 보부상 놀이를 이어가는 이유도 바로 이 역사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이다.
맺는말
전통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을 알고, 기록하고, 가르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 된다.
태조 이성계와 백달원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 전승의 경계에 있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수백 년 동안 보부상 사회에서 이어지며 조직의 정체성과 신의·충효·상부상조 정신을 형성해 왔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중요한 문화사적 의미를 가진다.
우리 예덕상무사 단원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보부상의 정신을 올바르게 배우고, 사실은 사실대로, 전승은 전승대로 소중하게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정확하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보부상의 길은 물건을 나르는 길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함께 나른 것은 신의와 의리, 그리고 공동체의 정신이었다.”
4강 기록으로 이어온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의리
1. 우리에게 고문서가 중요한 이유
강사 김영주 영위
예덕상무사의 역사는 단순히 옛날 장사꾼들이 모여 장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은 조직을 만들고, 임원을 정하고, 지켜야 할 규율을 문서로 남겼으며,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서로 돕는 제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접장을 맡았으며 누가 조직을 위해 봉사하였는지를 좌목(座目)과 선생안(先生案)에 기록하여 후대에 남겼습니다.
예덕상무사에는 1851년부터 이어지는 100여 건의 기록물이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의 좌목·절목·완문·선생안 등이 예덕상무사의 형성과 내력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미투리 하나, 패랭이 하나, 신표 하나, 제사 절차 하나까지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을 잃으면 역사를 잃고, 전통을 함부로 바꾸면 후손에게 전해 줄 역사의 한 부분을 스스로 없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1851년 예산본방 좌목 — 조직의 뿌리를 보여주는 기록
1851년 7월 예산본방장내좌목에는 김상렬 접장을 비롯하여 본방공원·도수공원·도공원·수공원·문서공원·처소공원·도집사·부집사·장무집사·발집사 등 매우 세분된 직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 이름만이 아닙니다.
당시 예덕상무사가 이미 접장을 중심으로 여러 직책을 두고 상당히 체계적인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예덕상무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인 **1851년 「예산임방입의절목」**에는 입의(立儀), 벌목(罰目), 신구접장교체규식(新舊接長交遞規式), 초상시부의전마련기, 비방청부전기, 한성부완문 등이 함께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즉 170여 년 전에도 이미
조직의 규율이 있었고,잘못에 대한 벌칙이 있었으며,접장을 교체하는 절차가 있었고,동료의 초상을 돕는 제도가 있었으며,관청과 관계된 공식 문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덕상무사의 역사입니다.
3. 1863년 「예산본방장내좌목」이 보여주는 조직력
1863년 3월의 「예산본방장내좌목」에는 반수 황기원, 선접장 이동규를 비롯하여 본방공원·도수공원·수공원·문서공원·처소공원·도집사 등 여러 직책과 인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산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면천 범근시, 대천시, 기지시, 당진 삼거리시 등의 좌목까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것은 당시 보부상 조직이 어느 한 장터의 작은 친목단체가 아니라 여러 장시를 연결하는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보잘것없는 장사치에게 무슨 역사가 있느냐”고 가볍게 말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길 위에서 장사를 하셨지만 스스로 질서를 세우고 조직을 운영하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4. 한성부완문에 담긴 보부상의 의리
예덕상무사 자료 가운데 단원 여러분께서 꼭 기억하셔야 할 글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살아가던 보부상들은 일정한 재산도 없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관에서 병이 들기도 하고 길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서로를 남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동료가 병들면 돕고, 죽으면 장례를 돕고, 가족이 없어도 서로 형제가 되어 주자는 정신을 문서로 남겼습니다.
1886년 문서에는 이러한 정신이 매우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형제 없이도 있는 것이요, 처자식 없이도 처자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맹한 사람들이 명예와 의리를 생각하고 삽혈(歃血)의 맹세를 소홀히 하지 말며, 옛사람의 돈독한 정의를 영원히 잊지 않도록 힘쓰자고 하였습니다. 당시 문서에는 팔도도반수 겸 도내도접장 이기헌, 반수 이치문, 영위 이화춘, 선접장 최성교를 비롯한 여러 임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 글은 보부상의 정신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보부상의 의리는 말로만 외치는 의리가 아니었습니다.병들면 돌보고, 죽으면 장례를 치러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돕는 생활 속의 의리였습니다.
5. 「보상선생안」 — 선조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
1888년 당시 접장 방세창이 보완하여 작성한 「보상선생안」은 매우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선생안의 첫머리에서는 조직을 먼저 창설하고 뒤이어 발전시킨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공훈과 공로가 있는데, 이를 글로 남기지 않으면 훗날의 역사가 어두워진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조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개인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접장 한 분의 이름도, 반수 한 분의 이름도, 공원 한 분의 이름도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예덕상무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약 40년 뒤인 1929년 유진호가 다시 기록을 이어가면서, 조직의 명맥이 어려움 속에서도 이어진 것은 여러 선생의 음덕과 유지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에게 이 기록을 없애지 말고 이어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것이 바로 전승입니다.
6. 1906년 좌목이 보여주는 예덕상무사의 개방성과 규모
1906년 「예산보상임소좌목」도 매우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당시 기록에는 영위 전 군수 정준용, 반수 전 도정 방세창, 접장 유종우(진호)등이 등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 상인 **왕문괴(王文魁)**가 부접장으로, 일본인 **상야위길(上野鳥吉)**도 부접장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 상인 4명이 여러 직책에 참여하고 일본인까지 부접장에 포함되어 있어 당시 상업조직의 교류 범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는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단순히 한 지역의 장터 역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7. 예덕상무사를 지켜 온 공로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유명한 인물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예덕상무사의 경우 이름 없이 조직을 지켜온 접장·반수·영위·공원·집사들과 수많은 사속들이야말로 실제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1851년 김상렬 접장을 비롯하여 이후 수많은 접장과 임원들이 조직을 이어 왔습니다. 선생안은 1885년부터 작성된 기록에서도 1851년 김상렬 접장까지 소급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따라서 앞으로 교육자료에서는 유명인만 나열하지 않고 김상렬·이기헌·이치문·이화춘·최성교·방세창·유진호 등 실제 문서에서 확인되는 예덕상무사의 공로자들도 별도로 소개해야 합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실제로 이어온 분들입니다.
8. 보부상과 관련하여 기억할 인물들
보부상 또는 행상·상업 활동과 관련하여 후대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토정 이지함은 직접 상업에 종사하면서 얻은 재물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박승직은 행상과 포목 거래에서 출발하여 상업 기반을 넓혔고, 훗날 두산으로 이어지는 기업사의 출발점이 된 인물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젊은 시절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한 경험이 있었고, 민중의 생활상을 직접 접한 경험은 그의 사상 형성 과정과 함께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용익역시 가난한 환경에서 상업활동을 경험한 뒤 고종 시대의 정치·경제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보성전문학교 설립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상업으로 기반을 일군 뒤 오산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임상옥은 의주 상업을 기반으로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조선 후기 대표적인 거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박기순역시 상업을 통해 기반을 마련하여 금융업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에는 김 추기경 자신을 ‘보부상 출신’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부모가 옹기·포목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간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부분은 교육자료의 신뢰성을 위해 ‘보부상으로 문헌상 확인되는 경우’, ‘행상·상업 활동이 확인되는 경우’, ‘보부상·행상 가문과 관련된 경우’를 구별하여 기록하겠습니다.
9. 단원 여러분께 꼭 부탁드립니다
단원 여러분께서 오늘 보시는 좌목 한 장, 절목 한 장, 선생안 한 장은 단순히 오래된 종이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17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이름과 조직, 규율, 의리, 장례와 상부상조, 접장의 책임과 임원들의 역할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선생안에는 **“글로 적어두지 않으면 훗날 일이 어둡고 캄캄해진다”**는 취지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원형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것을 우리 세대 마음대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미투리를 51년 동안 신어 왔다면 그 51년도 역사이고, 패랭이를 51년 동안 써 왔다면 그것 역시 역사입니다.
사설 한마디와 장단 하나에도 선배 단원들의 땀과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새로 만드는 사람이기 전에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역사를 다음 세대에 온전히 넘겨주어야 할 전승자입니다.
예덕상무사의 역사는 몇몇 유명한 사람의 역사가 아닙니다.
김상렬 접장으로부터 이름 없이 조직을 지켜온 수많은 접장·반수·영위·공원·집사와 사속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단원 여러분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선조들이 남겨주신 좌목·절목·선생안·완문과 사대강령, 신표, 공문제, 복식과 놀이를 소중하게 지키고 배우며, 다음 세대에 다시 물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기록이 이어져야 역사가 이어지고,사람이 이어져야 전통이 이어지며,원형을 지켜야 예덕상무사의 이름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이 자료는 앞서 만들던 제3강 단원 배포용 교육자료에 바로 이어 붙일 수 있는 형태로 구성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선생안의 취지를 살려 역대 접장과 실제 예덕상무사 공로자 부분을 더 크게 보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덕상무사를 지켜온 사람들과 전승의 역사
1. 기록을 남긴 선조들이 곧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예덕상무사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접장·반수·영위와 수많은 임원 및 사속들이 시대마다 조직을 지키고,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좌목·절목·선생안·완문 등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현재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핵심 문헌 가운데 하나인 1851년 「예산임방입의절목」에는 입의, 벌목, 신구접장교체규식, 초상시부의전마련기, 비방청부전기, 한성부완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예덕상무사가 이미 조직의 규율, 벌칙, 임원 교체, 상부상조 등에 관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1851년 좌목에는 김상렬 접장을 중심으로 본방공원·도수공원·도공원·수공원·문서공원·처소공원·도집사·집사 등 많은 임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따라서 우리는 김상렬 접장을 비롯하여 이름을 남긴 역대 접장과 임원들을 단순한 옛 명단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분들이 조직과 규율을 지키고 기록을 후대에 남겼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방세창 접장과 「보상선생안」
특히 기억해야 할 분 가운데 한 분이 방세창 접장입니다.
1888년 당시 접장 방세창은 이전의 선생안을 보완하여 「상리국예산보상접장선생안」을 새로 작성하였습니다. 그 첫머리에는 먼저 창설하고 뒤를 이어간 사람들의 공훈과 공로를 글로 남기지 않는다면 후대의 역사가 어둡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이 말씀은 오늘의 예덕상무사에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공로자를 기록하는 것은 개인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누가 어느 시대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만들어 다음 세대에 넘겨주었는지를 기록하는 것 자체가 전승이기 때문입니다.
1929년 유진호 선생 역시 선생안의 기록을 이어가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명맥이 이어진 것은 여러 선생들의 음덕과 유지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오늘의 우리도 이 정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3. 윤규상 선생 — 현대 예덕상무사 전승의 큰 기틀을 세우다
현대에 들어 예덕상무사의 전승을 이야기하면서 윤규상 선생의 업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윤규상 선생은 1974년 무렵 예덕상무사 접장을 맡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보부상 유품의 중요민속자료 지정, 보부상놀이 개발, 보부상유품전시관 건립 등 보부상 문화 복원과 전승에 힘썼습니다. 또한 후대에는 보부상촌 건립을 추진하며 보부상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하려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윤규상 선생을 예덕상무사 두령으로 소개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경향신문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품들은 1976년 중요민속자료 제30-2호로 지정되었으며, 선생안·공문 등 문헌과 인장·인궤·청사초롱 등 다양한 유품이 보존되어 왔습니다. 충남도청 의회
특히 윤규상 선생 시기에 정착·발전한 보부상놀이의 전승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학술연구에서도 예덕상무사가 전통적인 보부상의 기능이 사라져 가는 과정에서 그 문화를 ‘보부상놀이’로 승화하여 전승해 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KCI
따라서 윤규상 선생은 단순히 한 시대의 접장이나 두령으로만 기억할 분이 아니라, 사라져 가던 보부상의 생활문화와 정신을 놀이와 의례의 형태로 되살려 후대가 전승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투리·패랭이·흰 양말 등의 복식과 놀이의 형식 역시 단순한 공연 소품이 아니라 오랜 전승과정 속에서 지켜온 역사라는 점을 단원 여러분께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4. 김영주 영위 — 윤규상 두령을 뒷받침한 든든한 후원자
예덕상무사의 발전은 앞에서 이끌어 온 지도자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직을 지키고 후원한 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김영주 영위의 공적도 기억하고 기록하여야 합니다.
김영주 영위는 윤규상 두령이 예덕상무사의 전통을 지키고 보부상놀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며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특히 신협 조합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도 예덕상무사의 활동과 발전을 위하여 매년 찬조금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후원을 이어갔습니다.
전통문화의 전승은 뜻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공연과 제례, 의상과 소품, 단원들의 활동과 각종 행사에는 현실적인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김영주 영위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힘을 보태어 예덕상무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가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따라서 김영주 영위의 공적은 단순한 금전적 후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윤규상 두령과 함께 예덕상무사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뜻을 같이하고, 실제 행동으로 뒷받침한 현대 예덕상무사 전승사의 중요한 공로자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5. 윤철현 반수 — 선대의 뜻을 이어 법인화와 대외적 위상을 높이다
윤철현 반수는 부친인 윤규상 두령이 평생 지켜온 예덕상무사의 정신과 전승의 뜻을 이어받아, 예덕상무사가 시대 변화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조직의 기반을 다지는 데 힘썼습니다.
특히 개인과 임의단체 중심의 활동만으로는 예덕상무사를 장기적으로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법인 설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받아들여 법인화에 힘을 보탰습니다.
법인 설립 과정에서는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전대환이 등록 실무를 직접 맡았고,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대환 사무국장 700만원, 김성태 단원 600만원을 비롯하여 여러 단원이 100만원·50만원씩 뜻을 모았습니다. 윤철현 당시 접장도 100만원을 출연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정성과 희생으로 법인을 설립함으로써 예덕상무사는 단순한 친목·공연단체를 넘어 전통문화의 보존·전승과 각종 문화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윤철현 반수 재임 시기의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2017년 덕산온천 주차장 일원에서 개최된 대규모 행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행사는 이틀 동안 개최되었으며, 약 1억원의 보조금이 투입된 대규모 행사로 추진되어 예덕상무사의 보부상 문화와 전통을 지역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 언론을 통해 행사가 소개되면서 예덕상무사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외부에 알리고 대외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데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윤철현 반수의 공적은 부친 윤규상 두령이 일으켜 세운 현대 예덕상무사의 전승 기반을 이어받아 법인화라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규모 행사를 통해 예덕상무사의 존재와 문화적 가치를 지역사회와 외부에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전승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윤규상 두령이 현대 예덕상무사의 전승 기반과 보부상놀이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면, 김영주 영위는 그 활동을 꾸준히 후원하며 힘을 보탰고, 윤철현 반수는 부친의 뜻을 이어 법인화와 대외 활동의 기반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접장·반수·영위·임원과 이름 없이 힘을 보탠 수많은 단원들의 노력이 함께하였습니다.
따라서 예덕상무사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선대가 기틀을 세우고, 동료가 힘을 보태며, 후대가 그것을 기록하고 발전시켜 다시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공동의 역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음 장에 들어갈 전대환 반수의 법인설립 실무, 저술 및 60여 종의 역사전승자료 기증, 전수관·사무실·소품창고 확보, 관객석 증설, 의상·소품 확보, 향토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의 공적도 앞선 분들의 업적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6. 전대환 반수 — 기록화·법인화·전승기반 확충
현대의 예덕상무사가 앞으로 또다시 50년, 100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공연뿐 아니라 문서화·기록화·제도화와 전승 공간 확보가 필요합니다.
전대환 반수는 사무국장과 접장 등을 거치며 이러한 분야의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업들은 향후 예덕상무사 현대사의 기록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 예덕상무사 법인 설립 실무를 직접 추진하고 설립 자금 700만원을 출연하였습니다.
•
•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를 정리한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
• 도 무형문화재 지정 신청을 비롯하여 예덕상무사의 역사·문화·놀이·전승과 관련된 약 60종의 중요 자료를 직접 집필·정리하여 예덕상무사에 기증하였습니다.
•
• 소중한 자료를 개인 소유로 두지 않고 후대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증하였으며, 기증식 비용 약 300만원도 개인 비용으로 부담하여 기증 행사를 마련하였습니다.
•
• 예덕상무사 보부상놀이의 안정적인 전승을 위해 상시 연습장인 전수관을 확보하는 데 힘썼습니다.
•
• 조직의 행정과 자료관리를 위한 전용 사무실을 확보하는 데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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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과 행사에 필요한 의상과 각종 소품을 확보·정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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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부상놀이에 필요한 물품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소품창고 확보에 힘썼습니다.
•
• 공문제와 각종 행사에서 더 많은 주민과 관람객이 함께할 수 있도록 사당 앞 관객석 증설에 힘썼습니다.
•
• 예덕상무사의 오랜 역사와 놀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역사자료 발굴·정리·교육자료 제작과 전승교육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
• 특히 예덕상무사의 전통을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향토무형문화유산 등재 추진에 지속적으로 힘써 왔습니다.
•
이러한 활동은 어느 개인을 높이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1888년 방세창 접장이 선생안을 만들면서 선대의 공훈과 공로를 기록하지 않으면 후대의 역사가 어두워진다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의 활동 역시 사실대로 기록해 두어야 50년, 100년 뒤의 후손들이 예덕상무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전승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지_(사)예덕상무사_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
6. 선조의 기록에서 오늘의 기록으로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한 줄로 연결해 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851년 김상렬 접장 시대의 임방절목과 좌목 → 역대 접장과 임원들의 기록 → 1888년 방세창 접장의 선생안 정비 → 1929년 유진호 선생의 기록 계승 → 윤규상 선생의 보부상놀이 복원·전승 → 윤철현 접장 시기의 법인화 → 오늘날의 자료 기록화와 무형문화유산 지정 노력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바뀌었습니다. 시대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선대가 남긴 것을 기록하고, 지키고, 다음 세대에 넘겨준다”는 정신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원 여러분께서 지금 신고 계시는 미투리 한 켤레, 머리에 쓰시는 패랭이 하나, 가슴에 품는 신표 하나도 언젠가는 후손들이 오늘의 예덕상무사를 판단하는 역사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조의 것을 함부로 바꾸기보다 왜 그렇게 해왔는지를 먼저 배우고, 기록하고, 원형을 지키면서 다음 세대에 물려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역사를 넘겨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1851년의 절목과 좌목에서 오늘날 예덕상무사의 무형문화유산 전승 노력까지 이어지는 예덕상무사의 175 여년 기록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남도청 의회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는 조선시대 예산·덕산·면천·당진 등 충청남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부상 조직의 전통을 계승한 단체이다.
예덕상무사의 명칭은 예산(禮山)과 덕산(德山)의 첫 글자에서 유래하였으며,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상업활동과 상호부조, 조직 운영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1851년(철종 2년)부터 조직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상렬(金相烈)이 초대 접장을 맡았으며, 이후 역대 접장과 임원들이 조직을 이끌어 왔다.
예덕상무사는 단순한 상인들의 모임을 넘어 상호 신뢰와 협동, 질서와 의리를 중시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예덕상무사에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귀중한 역사문헌들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① 예산임방입의절목(禮山任房立議節目) — 1851년
예덕상무사의 조직 운영과 규율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이다.
조직의 운영 원칙, 벌칙, 신구 접장 교체 절차, 상례와 부조에 관한 규정 등이 담겨 있다.
이는 1851년 당시 이미 체계적인 조직 운영과 상호부조 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② 보상선생안(褓商先生案) — 1881년
보부상 조직의 역대 인물과 임원들을 기록한 자료로, 조직의 계보와 인적 구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③ 임소좌목(任所座目) — 1885년
보부상 조직의 임원 명단과 직책 등을 기록한 문헌이다.
역대 조직의 운영체계와 인물들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④ 의정부완문(議政府完文) — 1886년
조선시대 관청에서 발급한 공식 문서로, 보부상 조직과 국가 행정체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⑤ 예덕면당사읍임소소임안(禮德沔唐四邑任所所任案) — 1892년
예산·덕산·면천·당진 지역 보부상 조직의 임원과 운영 상황을 기록한 문헌이다.
네 고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보부상 조직의 연합 관계와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예덕상무사의 문헌자료는 1851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조사된 자료는 약 116건에 이른다.
자료는 절목류 6건, 좌목류 81건, 기타 문헌 29건으로 분류된다.
이들 문헌에는 조직의 규율, 임원 명단, 접장 교체, 관청과의 관계, 상호부조 및 제례에 관한 기록 등이 담겨 있다.
특히 일부 고문헌은 국가민속문화유산인 보부상 유품에 포함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문헌은 조선 후기 상업사와 서민생활사, 지역사회 공동체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예덕상무사는 1851년 초대 접장 김상렬로부터 시작하여 역대 접장과 임원들이 조직을 이어 왔다.
접장은 조직을 대표하고 전통의례와 주요 행사를 주관하는 직책이며, 반수와 여러 임원들은 조직의 운영과 전승을 뒷받침하였다.
역대 접장 명부와 임원록은 예덕상무사의 조직적 계승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오늘날에도 예덕상무사는 공문제와 보부상놀이, 전통의례 및 후계자 교육을 통하여 선조들의 정신과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가치는 조선 후기 보부상 조직의 문헌과 유품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조직과 의례의 전통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다는 데 있다.
고문헌은 과거의 조직과 활동을 증명하고, 공문제와 보부상놀이는 선조들의 공동체 정신을 오늘날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예덕상무사의 고문헌과 역사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고 영구 보존하는 일은 지역의 역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통 상업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중요한 사업이다.
주요 참고자료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보부상 난전 놀이 연구용역 최종보고서』(2013)
『내포의 역사와 문화』(2015)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2016)
예덕상무사 소장 고문헌 및 역대 접장 기록
편집: 예덕상무사 역사자료 정리본
예덕상무사의 공문제는 조선 후기 보부상들이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고 조직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거행해 온 전통의례이다.
공문제에서 말하는 공문은 보부상 조직의 역사와 권위를 상징하는 문서로, 관청에서 발급한 완문과 절목, 역대 임원들의 이름을 기록한 선생안 등이 포함된다.
보부상들은 이러한 공문서와 조직의 상징물을 소중히 보존하며 선조들의 정신과 조직의 정통성을 계승해 왔다.
공문제는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보부상 공동체의 역사와 의례, 음악, 놀이가 결합된 전통문화이다.
예덕상무사의 공문제는 크게 영감제사와 사속제사로 구성된다.
① 영감제사
영감제사는 역대 접장과 조직을 이끌어 온 선대 인물들의 공덕을 기리는 의례이다.
전통 제례 형식에 따라 헌작과 축문 봉독 등을 진행하며, 선조들의 뜻을 받들고 조직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의미를 지닌다.
② 사속제사
사속제사는 예덕상무사 공동체에 속했던 선조들을 추모하는 의례이다.
신위록에 기록된 선조들을 기리며, 후손과 단원들이 공동체의 화합과 전통 계승을 다짐한다.
이 두 의례는 보부상들이 오랫동안 지켜 온 충의와 신의, 상부상조의 정신을 오늘날까지 이어 주는 중요한 전통이다.
예덕상무사에는 역대 보부상 선조와 관련 인물 약 5,400명의 이름을 기록한 신위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위록은 선조들의 이름과 자취를 후대에 전하고, 공문제에서 그들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한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제124대 접장을 역임한 전대환 반수는 약 5,400명의 신위록을 작성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제례 전승과 역사기록 보존에 기여하였다.
이는 단순한 명부 정리를 넘어 보부상 공동체의 역사적 계보와 선조들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기록문화 사업이다.
예덕상무사는 역대 접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하며 전통적인 임원 교체 절차를 계승해 왔다.
1851년의 예산임방입의절목에는 신구 접장 교체에 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부터 조직적인 운영 질서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접장 교체 의례는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고 전임 접장의 노고를 기리며, 조직의 화합과 전통 계승을 다짐하는 행사이다.
접장과 반수, 임방 및 여러 임원들의 역할은 예덕상무사의 조직문화와 공동체 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계화자 타령은 예덕상무사에 전승되어 온 대표적인 보부상 노래이다.
전승 가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개화 개화 개화가 좋소.
태조대왕 등극 후에
우리 생명 건져냈소."
이 노래는 보부상들이 전해 온 태조 이성계 관련 역사적 전승과 공동체의 기억을 담고 있다.
느린 가락과 빠른 가락으로 부르며, 여러 사람이 함께 소리를 주고받는 전승 형태를 지닌다.
계화자 타령은 보부상들의 역사 인식과 공동체 정서를 보여주는 귀중한 구전문화이다.
죽방울놀이는 보부상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흥을 돋우기 위하여 연행하던 전통 기예이다.
나무로 만든 죽방울을 두 개의 채에 연결된 줄 위에서 회전시키며 다양한 동작을 펼친다.
예덕상무사에서는 윤규상 두령을 비롯한 전승자들의 조사와 복원 노력으로 죽방울놀이를 다시 연행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민속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전승과 재현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후계자 교육과 공연을 통하여 기술을 이어 왔다.
죽방울놀이는 보부상 장터문화의 흥과 기예를 보여주는 중요한 전통놀이이다.
① 장문놀이
장문놀이는 보부상들이 장터에서 펼치던 말과 몸짓, 노래와 연희를 재현하는 전통공연이다.
장터에서의 상거래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표현하며, 보부상들의 재치와 해학, 공동체 문화를 보여준다.
② 난전놀이
난전놀이는 옛 장터에서 이루어지던 상인들의 거래와 생활 모습을 연희 형식으로 재현한 놀이이다.
장사꾼들의 외침과 흥정, 타령과 익살스러운 대화 등을 통하여 옛 장터의 활기찬 모습을 전달한다.
이러한 놀이는 전통 상업문화와 서민들의 생활상을 후대에 전하는 민속문화로서 가치가 있다.
예덕상무사의 장터풍장은 보부상들이 모이고 행사를 진행할 때 공동체의 흥과 결속을 표현하는 음악 전통이다.
삼채와 이채, 쌍북과 양장구 등 다양한 장단과 악기가 어우러져 장터의 활기를 표현한다.
풍장은 공문제와 전통공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단원들의 공동 참여와 화합을 이끌어 내는 기능을 한다.
또한 약장사놀이, 장타령, 영감 영접놀이, 가장행렬 등 여러 연희 요소가 시대에 따라 재현되고 발전해 왔다.
예덕상무사는 시대의 변화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보부상놀이와 전통의례를 조사·복원하고 후손들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전승 교본 제작, 공연 대사와 노래 정리, 전통 복식과 소품 확보, 전수교육과 공연활동 등을 통하여 전통문화 보존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특히 역사자료의 기록화와 후계자 교육은 예덕상무사의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미래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예덕상무사의 공문제와 보부상놀이는 조선 후기 상업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가 현대까지 전승되어 온 귀중한 민속문화이다.
공문제는 선조들에 대한 추모와 공동체의 결속을, 보부상놀이는 옛 장터의 생활상과 서민들의 지혜와 해학을 보여준다.
또한 계화자 타령과 장터풍장은 보부상들이 함께 부르고 연주하던 음악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예덕상무사는 문헌과 유물뿐 아니라 의례, 음악, 놀이, 공동체 조직이 함께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선조들의 정신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전승하는 일은 예덕상무사가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사명이다.
주요 참고자료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예덕상무사 공문제 문화유산 지정 신청 관련 자료
예덕상무사 신위록 및 전통의례 기록
예덕상무사 전승 교본과 구술자료
보부상놀이 관련 조사·연구자료
편집: 예덕상무사 역사자료 정리본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 보부상 조직의 역사와 전통을 오늘날까지 계승해 온 중요한 상업문화 공동체이다.
예산·덕산·면천·당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부상들의 조직과 생활, 상업활동 및 전통의례는 한국 상업사와 민속학 연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1851년부터 이어지는 고문헌과 역대 접장 기록, 공문제와 보부상놀이, 구술자료 등은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정통성과 문화유산적 가치를 밝히는 핵심 자료이다.
이러한 역사문화의 가치를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하여 학술연구와 조사보고서 발간, 역사자료 수집 및 전승 기록화 사업 등이 이루어져 왔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은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조사·연구하는 전문기관이다.
예덕상무사와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주요 연구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문헌이 있다.
① 『보부상 난전 놀이 연구용역 최종보고서』(2013)
예산군의 보부상 난전놀이 연구자료로, 보부상놀이의 전승과 복원, 공연문화의 가치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② 『내포의 역사와 문화』(2015)
충청남도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자료로, 내포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문헌이다.
이러한 연구자료는 예덕상무사의 전승문화를 지역의 역사와 연결하여 이해하고,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방향을 마련하는 데 참고할 가치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 문헌자료 등을 연구하는 학술기관이다.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2016)**은 예산·덕산·면천·당진 지역의 보부상 조직과 기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보부상 조직의 임원 명부와 운영 규정, 상업활동 및 공동체 기록은 조선 후기 지방 상업조직의 특징을 밝히는 역사자료이다.
특히 예덕상무사의 좌목과 선생안, 완문과 절목은 당시 상인들의 조직체계와 공동체 질서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뿐만 아니라 실제 보부상들의 경험과 기억을 기록한 구술자료도 중요하다.
유진룡의 구술자료는 보부상들의 장터 생활과 이동, 상거래, 조직문화 및 공동체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가치가 있다.
전대환 반수가 편찬한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에서도 유진룡 구술 관련 자료를 참고문헌의 출처로 제시하고 있다.
구술자료는 문헌에 남아 있지 않은 당시의 생활 모습과 경험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구술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은 고문헌과 다른 사료를 대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전승 설화와 역사적 사실을 구분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예덕상무사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밝히기 위하여 학술 세미나와 전문가 연구 발표가 이루어졌다.
① 조재곤 연구교수의 보부상 조직 연구
2016년 학술 발표에서는 조선 후기 보부상 조직의 임원 구성과 운영체계, 신표와 영업 허가 관련 문서 등을 다루었다.
이를 통하여 보부상이 단순한 행상 집단이 아니라 조직적인 운영 규정과 질서를 갖춘 상업 공동체였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② 이창식 교수의 보부상 문화 연구
보부상 문화의 역사적 전개와 공동체 정신, 전통문화의 보존 및 문화산업적 활용 가능성 등을 연구하였다.
보부상들의 상호 신뢰와 협동, 상도덕과 공동체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③ 기타 전문가들의 연구와 제언
역사학과 민속학, 전통문화 분야의 연구자들은 보부상 조직과 공문제, 장터놀이 등의 역사적 의미와 전승 가치를 검토하였다.
이러한 학술활동은 예덕상무사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향후 보존·전승 방향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예덕상무사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역사적 가치
1851년부터 이어지는 고문헌과 역대 접장 기록은 조선 후기 보부상 조직의 역사와 운영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둘째, 학술적 가치
보부상 조직의 형성과 운영, 장시 경제, 상업문화, 공동체 질서 등을 연구할 수 있는 다양한 문헌과 구술자료가 남아 있다.
셋째, 민속문화적 가치
공문제와 계화자 타령, 죽방울놀이, 장문놀이, 난전놀이 등은 전통 상업문화와 민속 연희의 특징을 보여준다.
넷째, 공동체적 가치
역대 접장과 임원, 단원들이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전통을 이어 온 조직문화는 상부상조와 신의의 가치를 보여준다.
다섯째, 전승의 지속성
고문헌과 유물의 보존에 그치지 않고 제례와 공연, 교육과 후계자 양성 등을 통하여 전통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덕상무사는 오랜 역사와 전승문화를 인정받기 위하여 무형문화유산 지정 관련 자료 정비와 학술연구, 기록화 및 관계기관 협의 등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예산군 향토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역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충청남도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신청자료와 역사적 고증자료, 학술논문 및 관련 세부자료를 정리하는 노력도 이어져 왔다.
향후에는 고문헌과 구술자료의 체계적인 보존, 전승 교육의 확대, 공연과 의례의 전형 유지, 후계자 양성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덕상무사 제124대 접장을 역임한 전대환 반수는 역사자료 수집과 저술, 전승 교본 제작 및 무형문화유산 지정 추진에 참여하였다.
특히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을 저술하여 예덕상무사의 역사성과 지속성, 예술성, 학술성 및 지역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충청남도 무형문화유산 지정 관련 신청서와 논문, 역사적 고증자료 및 세부자료를 집필·정리하여 제공하였다.
역대 접장 기록과 공문제 관련 문헌을 정리하고, 약 5,400명의 신위록을 작성하여 선조들의 역사와 공동체의 전통을 후대에 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기록화 사업은 예덕상무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지거나 단절되지 않고 후손들에게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예덕상무사의 전통문화는 과거의 유산인 동시에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앞으로 고문헌과 역사자료의 디지털 보존, 구술자료의 체계적인 정리, 전통의례와 보부상놀이의 기록화, 전수교육 확대 및 학술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전통을 지역 관광 및 문화교육과 연계하여 많은 국민이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예덕상무사의 역사를 보존하는 일은 단순히 한 단체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상업문화와 서민들의 삶, 공동체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뜻깊은 일이다.
전대환,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예산군, 『보부상 난전 놀이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2013.
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내포의 역사와 문화』, 201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돌뱅이의 조직과 기록』 예산·덕산·면천·당진 편, 2016.
유진룡 구술 관련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부상 관련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관련 자료
2016~2017년 보부상 관련 학술 세미나 발표자료
예덕상무사 소장 고문헌·역대 접장 명부·공문제 기록
예덕상무사 무형문화유산 지정 관련 신청자료
예덕상무사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보부상들의 역사와 전통, 공동체 정신을 간직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선조들이 남긴 문헌과 유물, 공문제와 전통놀이, 그리고 이를 지켜 온 전승자들의 헌신은 후손들이 소중히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다.
예덕상무사는 앞으로도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에 힘쓰고, 우리나라 보부상 문화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할 것이다.
예덕상무사 역사자료 정리본
보부상은 조선시대 전국의 장터를 오가며 물품을 유통시키고 지역 간 교류를 이어 온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소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특히 장터와 장터를 연결하는 상업망은 지역 간 정보 교환과 민심의 흐름을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러한 보부상 조직의 역사와 활동은 대한민국의 상업 발전뿐 아니라 근현대 사회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박승직(1864~1950)은 행상에서 출발하여 근대적인 상점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1882년 무렵 포목 행상을 시작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판매하면서 상업 경험을 쌓았다.
이후 서울 배오개에 박승직상점을 열어 사업을 발전시켰으며, 이 상점은 훗날 두산그룹으로 이어지는 기업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박승직의 활동은 전통적인 행상 문화가 근대적인 상업과 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만 박승직이 예덕상무사에 직접 소속되었다는 기록은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이동하며 물품을 거래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소식과 물가, 상업 정보, 사회적 변화에 관한 소식도 함께 전달되었다.
보부상 조직은 임방과 접장 등 자체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으며, 구성원 간 연락과 정보 전달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특성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다만 일반적인 상업 정보의 전달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통신 활동은 구분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1908~1932)는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윤봉길 의사는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통하여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윤봉길 의사가 활동하던 예산 지역은 오래전부터 장시와 보부상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당시 장터의 정보 교류와 지역사회 조직이 독립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할 가치가 있다.
특히 보부상들이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연락이나 통신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전승이 있다면 관련 구술자료와 역사문헌을 조사하여 사실관계를 밝혀야 한다.
현재 확보된 자료만으로는 예덕상무사가 윤봉길 의사의 비밀통신을 직접 담당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인물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의 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관계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김구 선생이 예덕상무사와 직접 교류하였는지, 보부상 조직을 독립운동의 연락망으로 활용하였는지는 별도의 사료 확인이 필요하다.
이승만 박사(1875~1965)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승만 박사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보부상 조직은 한국 사회의 상업문화와 지역 공동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와 예덕상무사 사이에 공식적인 교류나 지원 관계가 있었는지는 현재 확보된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향후 예덕상무사 소장 문헌과 당시 신문기사, 방문기록, 서신 등을 통하여 관련 사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정치 지도자이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신익희 선생과 보부상 조직의 관계 역시 근현대사 연구의 한 주제로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예덕상무사와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추가적인 문헌과 기록을 통하여 확인해야 한다.
보부상은 조선 후기 상업과 물자 유통에 기여하였으며, 상호부조와 공동체 조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근대 정치사의 격변기에는 일부 보부상 조직이 정치적 세력과 결합하여 갈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보부상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상업 발전과 공동체 문화에 기여한 공적뿐 아니라 당시 정치·사회적 활동도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역사 연구는 예덕상무사의 전통과 문화유산적 가치를 더욱 정확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보부상 조직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특히 역대 접장 명부와 완문, 절목, 신위록 및 각종 유물은 보부상 조직의 활동과 역사적 정통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앞으로는 근현대 유명 인물들과 보부상 조직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역사자료 조사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박승직과 같은 행상 출신 기업인의 활동,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과 지역 장터의 관계, 김구·이승만·신익희 등 근현대 주요 인물과 상무사 조직의 교류 여부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한다면 보부상 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부상은 오랜 세월 전국의 장터를 누비며 우리 민족의 경제와 생활을 이어 온 상인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상도덕과 신의, 협동과 상부상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예덕상무사는 이러한 전통을 보존하고, 고문헌과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조사하여 후대에 정확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주요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승직」·「보부상」·「보부상 유품」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 근대 상업사 관련 자료
조재곤, 『한국 근대사회와 보부상』, 2001.
유자후, 『보부상이란』
예덕상무사 소장 고문헌 및 역사자료
윤봉길 의사 독립운동 관련 기록
예덕상무사 역사자료 정리본
보부상은 조선시대 전국의 장터를 오가며 물품을 유통시키고 지역 간 교류를 이어 온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소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특히 장터와 장터를 연결하는 상업망은 지역 간 정보 교환과 민심의 흐름을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러한 보부상 조직의 역사와 활동은 대한민국의 상업 발전뿐 아니라 근현대 사회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박승직(1864~1950)은 행상에서 출발하여 근대적인 상점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1882년 무렵 포목 행상을 시작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판매하면서 상업 경험을 쌓았다.
이후 서울 배오개에 박승직상점을 열어 사업을 발전시켰으며, 이 상점은 훗날 두산그룹으로 이어지는 기업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박승직의 활동은 전통적인 행상 문화가 근대적인 상업과 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만 박승직이 예덕상무사에 직접 소속되었다는 기록은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이동하며 물품을 거래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소식과 물가, 상업 정보, 사회적 변화에 관한 소식도 함께 전달되었다.
보부상 조직은 임방과 접장 등 자체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으며, 구성원 간 연락과 정보 전달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특성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다만 일반적인 상업 정보의 전달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통신 활동은 구분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1908~1932)는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윤봉길 의사는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통하여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윤봉길 의사가 활동하던 예산 지역은 오래전부터 장시와 보부상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당시 장터의 정보 교류와 지역사회 조직이 독립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할 가치가 있다.
특히 보부상들이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연락이나 통신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전승이 있다면 관련 구술자료와 역사문헌을 조사하여 사실관계를 밝혀야 한다.
현재 확보된 자료만으로는 예덕상무사가 윤봉길 의사의 비밀통신을 직접 담당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인물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의 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관계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김구 선생이 예덕상무사와 직접 교류하였는지, 보부상 조직을 독립운동의 연락망으로 활용하였는지는 별도의 사료 확인이 필요하다.
이승만 박사(1875~1965)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승만 박사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보부상 조직은 한국 사회의 상업문화와 지역 공동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와 예덕상무사 사이에 공식적인 교류나 지원 관계가 있었는지는 현재 확보된 자료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향후 예덕상무사 소장 문헌과 당시 신문기사, 방문기록, 서신 등을 통하여 관련 사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정치 지도자이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신익희 선생과 보부상 조직의 관계 역시 근현대사 연구의 한 주제로 검토할 수 있다.
다만 예덕상무사와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추가적인 문헌과 기록을 통하여 확인해야 한다.
보부상은 조선 후기 상업과 물자 유통에 기여하였으며, 상호부조와 공동체 조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근대 정치사의 격변기에는 일부 보부상 조직이 정치적 세력과 결합하여 갈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보부상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상업 발전과 공동체 문화에 기여한 공적뿐 아니라 당시 정치·사회적 활동도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역사 연구는 예덕상무사의 전통과 문화유산적 가치를 더욱 정확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보부상 조직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특히 역대 접장 명부와 완문, 절목, 신위록 및 각종 유물은 보부상 조직의 활동과 역사적 정통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앞으로는 근현대 유명 인물들과 보부상 조직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역사자료 조사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박승직과 같은 행상 출신 기업인의 활동, 윤봉길 의사의 독립운동과 지역 장터의 관계, 김구·이승만·신익희 등 근현대 주요 인물과 상무사 조직의 교류 여부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한다면 보부상 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부상은 오랜 세월 전국의 장터를 누비며 우리 민족의 경제와 생활을 이어 온 상인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상도덕과 신의, 협동과 상부상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예덕상무사는 이러한 전통을 보존하고, 고문헌과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조사하여 후대에 정확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주요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승직」·「보부상」·「보부상 유품」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 근대 상업사 관련 자료
조재곤, 『한국 근대사회와 보부상』, 2001.
유자후, 『보부상이란』
예덕상무사 소장 고문헌 및 역사자료
윤봉길 의사 독립운동 관련 기록
예덕상무사 역사자료 정리본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는 조선 후기 예산·덕산·면천·당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보부상 조직의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 온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예덕상무사는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온 공문제와 보부상놀이를 보존하기 위하여 학자와 교수, 민속예술 전문가 및 전승자들의 지도 아래 체계적인 교육을 지속해 왔다.
전통의례와 장터풍장, 죽방울놀이, 장문놀이, 난전놀이, 계화자 타령 등을 조사·복원하고, 단원들이 직접 배우고 연습하여 공연과 제례에 참여하도록 전승교육을 실시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예덕상무사의 전통을 단순한 민속공연이 아니라 역사적 근거와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죽방울놀이는 전통 장터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흥을 돋우기 위하여 연행하던 민속 기예이다.
두 개의 채를 연결한 줄 위에서 나무로 만든 죽방울을 회전시키고 다양한 동작을 펼치는 놀이로, 뛰어난 손기술과 균형감각이 요구된다.
보부상들은 장터에서 물건을 팔거나 손님을 모으기 위하여 노래와 재담, 여러 기예를 활용하였다.
죽방울놀이 역시 이러한 장터문화 속에서 발전한 전통 연희의 하나이다.
예덕상무사의 죽방울놀이는 나무로 만든 전통 죽방울을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으며, 보부상 장터문화의 역사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민속예술이다.
예덕상무사의 죽방울놀이 전승에는 윤규상 두령의 공헌이 크다.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에 따르면 1940년 무렵 맹재명의 죽방울놀이 전승이 단절된 이후, 1970년대 윤규상 두령은 박재만·김갑룡·모순기·신태호 등과 함께 덕산장에서 행해졌던 죽방울놀이와 장터의 여러 기예를 조사·발굴하였다.
이들은 보부상들이 장터에서 펼치던 타령과 호객행위, 죽방울놀이 등을 기록으로 남기고 사라져 가던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중앙대학교 임동권 교수의 학술적 조언을 받아 덕산고등학교와 예덕상무사에서 죽방울놀이를 재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복원 활동은 전승이 끊길 위기에 놓였던 장터 민속예술을 다시 살려 낸 중요한 문화적 성과이다.
예덕상무사는 죽방울놀이를 비롯한 전통연희를 체계적으로 전승하기 위하여 전문가들의 지도와 단원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다.
특히 이기승 선생은 예덕상무사의 예술지도와 연출을 맡아 죽방울 기술과 공연을 지도하고, 학교와 예덕상무사 단원들에게 전통 기예를 가르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민속학자와 교수, 전통예술 관계자들의 연구와 자문을 바탕으로 보부상놀이의 구성과 연행 방식을 정리하고, 단원들이 반복적인 실습과 공연을 통해 기량을 높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전통을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와 연행 방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승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예덕상무사의 사당은 보부상의 시조로 전해지는 백달원과 역대 접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는 신성한 공간이다.
사당은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정통성과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며, 공문제를 비롯한 전통의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① 옛 사당의 건립
1970년대 윤규상 두령은 예덕상무사의 역사자료와 유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시관과 사우를 마련하였다.
1976년 무렵 덕산면사무소 인근에 건립된 사우에는 보부상의 시조로 전해지는 백달원과 역대 접장들의 위패를 모셨다.
윤규상 두령의 노력은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② 옛 사당의 소실과 위패 보존
이후 덕산면사무소 증축 과정에서 옛 사우가 없어지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예덕상무사는 선조들의 위패를 소중히 보존하며 공문제와 추모 의례의 전통을 이어 왔다.
③ 내포보부상촌의 새로운 사당
2020년 내포보부상촌에 새로운 사당이 마련되면서 보존해 온 위패를 옮겨 모시게 되었다.
현재 내포보부상촌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은 예덕상무사의 선조들을 기리고 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역대 접장과 선조들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역사문화 교육의 장소이기도 하다.
예덕상무사 사당에는 보부상의 시조로 전해지는 백달원과 역대 접장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203쪽에 따르면 백달원 위패는 제작된 지 1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위패들은 1976년 전시관과 사우를 건립하면서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22년 당시 기록에는 백달원 위패 외에 역대 접장 123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이들 위패는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계보와 선조들의 공덕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귀중한 유산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접장 계보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위패의 수량과 봉안 현황도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예덕상무사의 공문제는 역대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고 조직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전통의례이다.
공문제 교육에서는 영감제사와 사속제사의 의미, 제례 절차, 헌관의 역할, 축문 봉독, 전통 복식과 제구의 사용 방법 등을 익힌다.
또한 약 5,400명의 선조 이름을 정리한 신위록과 역대 접장 기록을 활용하여 예덕상무사의 역사적 계보를 이해하도록 한다.
공문제는 단원들이 선조들의 정신을 배우고 공동체의 전통을 직접 실천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이다.
예덕상무사는 전통문화의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를 밝히기 위하여 여러 차례 학술 세미나와 포럼, 전문가 토론 및 연구 발표에 참여해 왔다.
특히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관련 학술 발표에서는 보부상의 조직과 역사, 공동체 정신, 전통의례, 보부상놀이의 전승과 문화적 활용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주요 연구와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재곤 연구교수
조선 후기 보부상 조직의 운영체계와 임원 구성, 신표 및 상업활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보부상 조직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이창식 교수
보부상 공동체의 역사적 전개와 상도덕, 전통문화의 보존 및 문화산업적 활용 방안 등을 연구하였다.
임동권 교수
죽방울놀이의 재현과 전승 과정에 학술적 조언을 제공하여 전통 민속예술의 복원에 기여하였다.
박미수 교수
보부상촌의 문화적 특성을 활용한 브랜드화와 전통문화 상품 개발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오석민 충남 역사문화 분야 전문가
보부상 전통문화를 문화예술축제로 활성화하고 지역문화 발전과 연계할 필요성을 제안하였다.
이충훈 연구위원
보부상 캐릭터 개발과 문화콘텐츠 활용, 지역 관광과 연계한 문화산업 발전 방향 등을 연구하였다.
그 밖의 연구자와 관계 전문가
공문제의 역사적 의미와 보부상놀이의 전승, 문화유산 지정 필요성 및 후계자 양성 방안 등을 연구하고 논의하였다.
이러한 학술활동은 예덕상무사의 전통문화가 역사적 근거와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예덕상무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보부상 장터문화를 조사하고 복원하여 공연으로 발전시켜 왔다.
1970년대에는 죽방울놀이를 중심으로 전통연희를 재현하였다.
1980년대에는 장타령과 풍장, 영감 행진놀이 등을 추가하여 공연의 폭을 넓혔다.
1990년대에는 영감 영접놀이와 가장행렬, 장시 재수굿 등 다양한 장터 민속을 결합하였다.
2000년대에는 권점놀이와 장문놀이, 상여놀이, 공문제 등 여러 전통 요소를 공연과 의례에 반영하였다.
이처럼 예덕상무사의 보부상놀이는 오랜 조사와 복원, 교육과 공연을 통하여 전승되어 왔다.
예덕상무사는 조선 후기부터 전해져 온 고문헌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1851년 예산임방절목을 비롯한 좌목과 선생안, 완문과 임원록 등은 당시 보부상 조직의 운영과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예덕상무사의 유품 가운데 인장 6개, 인궤 1개, 청사초롱 2개, 공문 16점 등 총 25점은 1976년 5월 21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현재 예산보부상박물관에서 보존·관리되고 있으며, 예덕상무사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예덕상무사는 전통의례와 보부상놀이를 올바르게 전승하기 위하여 관련 문헌과 구술자료를 수집하고 교본을 제작해 왔다.
특히 제124대 접장을 역임한 전대환 반수는 역사자료의 정리와 전승 교본 제작, 공문제 관련 문헌 정비, 신위록 작성 및 문화유산 지정 신청자료 준비 등에 힘써 왔다.
또한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을 편찬하여 예덕상무사의 역사성과 지속성, 예술성, 학술성 및 지역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기록화 노력은 예덕상무사의 전통이 후대에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예덕상무사의 역사문화 교육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사업이 중요하다.
전통의례와 보부상놀이의 정기적인 교육 및 실습
죽방울놀이와 장터풍장의 전문 전승자 양성
고문헌과 유물의 디지털 기록화 및 영구 보존
역사학자와 민속학자 등 전문가의 지속적인 학술 자문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보부상 역사문화 체험교육
공문제와 전통공연의 영상·음원 기록 보존
학술 세미나와 포럼의 정례화 및 연구자료 발간
내포보부상촌과 연계한 역사문화 교육 프로그램 운영
이러한 교육과 전승사업을 통하여 예덕상무사의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미래 세대까지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덕상무사는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노력해 왔다.
윤규상 두령을 비롯한 역대 접장과 전승자들의 헌신, 학자와 교수들의 학술적 연구와 지도, 단원들의 꾸준한 교육과 공연활동은 오늘날 예덕상무사가 전통을 이어 올 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이다.
옛 사당에서 새로운 내포보부상촌 사당으로 이어진 역사는 예덕상무사가 겪어 온 변화와 전통 보존의 노력을 상징한다.
예덕상무사는 앞으로도 선조들의 정신을 받들고 학술연구와 교육, 기록화와 후계자 양성에 힘써 대한민국 보부상 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주요 참고자료
『보부상 예덕상무사의 문화재 가치성』, 202~203쪽 및 220~225쪽
예덕상무사 공문제와 보부상놀이 관련 기록
2016~2019년 보부상 관련 학술 세미나 발표자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보부상 유품(2)」
예산군 내포보부상촌 및 예산보부상박물관 자료
예덕상무사 역대 접장 기록과 전승 교육자료
예덕상무사 역사문화 교육자료